성령강림 후 네 번째 주일/민족화해주일(20230625)
먼저 화해하여라
마태복음 5:21~24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남북의 교회가 함께 민족화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7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후 3년 뒤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 70년이 지났는데도 분단현실을 극복되지 않았고 평화의 길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잠사나마 평화통일의 꿈을 꿔보기도 했지만, 현재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신 냉전적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하는 불의한 제국들의 전쟁연습으로 인해 남과 북은 연일 서로를 비방하며 적대감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각종 첨단 무기들의 전시장과 실험장으로 변화되었고,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화해를 기원하는 주일로 지키며 공동기도문을 나눈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화해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형제간의 갈등의 역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갈등과 화해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태어난 첫 사람 가인은 형제 아벨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적자와 서자의 갈등으로 갈라서야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장자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서로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형제를 종으로 팔아버리기도 했습니다. 원래 한 나라였던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형제의 나라를 치기 위해 이방나라와 동맹을 맺기도 하고, 형제의 나라가 망할 때는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갈등의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이야기도 전해줍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화해했고, 에서와 야곱도 브니엘에서 화해했습니다. 요셉과 형제들도 오랜 갈등을 풀고 서로 받아들입니다.
화해라는 주제는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화해는 하나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화해는 하나입니다.
화해의 반대말은 불화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득해서 마음의 담을 쌓고 사는 것이 불화입니다. 관계의 단절입니다. 이런 관계단절의 바탕에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멸시가 자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니 ‘원수처럼’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성들을 상실했습니다. 이 관계성의 상실이 죄요, 죄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는 관계성을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녁을 벗어난 화살이 죄(hamartia)를 상징한다면, 다시 과녁을 향해서 사는 것이 돌아섬이요, 회개(metanoia)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4가지 관계성을 맺으며 더불어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이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심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에 기장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자연과의 관계성입니다. 아담을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셔서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때 서로를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는 사람과의 관계성입니다. 짝을 지어주셔서 서로 의지하며 서로 보완하며 살아갈 때 삶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네 번째로는 자아와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 자연, 타자와의 관계성을 잘 유지하며 살아갈 때 온전한 자신을 피워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이후, 이 관계성들은 끊어졌고, 막혔고,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거나 지배하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자도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온 결과 서로에게 축복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던 것들에게 쏜 화살이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자연재해, 인간 사이의 혐오와 차별, 자아분열 이 모든 것들은 화해하지 못하고 살아온 결과물들입니다. 서로 살인자로 살아가는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뜻을 밝혀주고 계십니다.
살인은 단순히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나 자매에게 화를 내거나, 얼간이, 바보라고 부르는 것도 살인에 버금가는 죄라고 하십니다. SNS의 폭력적인 댓글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살’이라고 개인에게 그 책임을 넘기지만, 사실은 ‘사회적인 타살’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인 언행들을 익명의 그늘에 숨어 마음껏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누군가를 아예 배제하거나 무시할 때도 많습니다. 그리고 때론 내가 상처를 입고, 무시당하거나 배제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불식간에 ‘살인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높은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형제나 자매를 보고 성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요구는 사실 참으로 어려운 요구입니다.
살다보면 분노해야할 때도 있고, 성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말씀은 기득권세력이 오용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불의한 세상에 대해 침묵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분노했고, 항거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의 참뜻을 알지 못하면 ‘거룩한 분노도 할 줄 모르는 청맹과니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금하신 ‘분노’는 ‘습관이 된 분노’ 혹은 ‘악한 의도가 있는 분노’입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주겠다고 대드는 자들의 분노입니다.
자기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고,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하고, 혐오하고, 적대시하며 미워하는 분노입니다.
자기 기준에 따라서 남을 판단하면서, 그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분노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고, 십자가 보혈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고전 7:23)’을 바보, 얼간이라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내지 말고, 형제를 모욕하는 언사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후에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23절과 2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14)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찬송하고 예배합니다. 예배드린다고 광장에 모여서 상대방을 죽이자고 선동하는 이들도 있으니 예배가 참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살다보면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예배자로서 살아가려면 이런 갈등은 속히 풀어야 합니다. 시간을 끌수록 갈등은 깊어지고,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의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깃들어있지 않는 마음은 이미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화해자의 사명을 감당하겠습니까?
성직자를 나타내는 라틴어 pontifex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이 단어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직자란, 관계가 끊어진 곳에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죄로 인해 하나님, 자연, 이웃,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성직자입니다. 우리는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이후 ‘만인사제론’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다리를 놓는 사람’은 성직자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얽히고설킨 문제를 푸는 일,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도 어려운 일입니다만,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피를 흘린 한 맺힌 이들의 신음소리가 여전한 한반도에서 화해를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헐기 위해 몸을 바쳐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찢으셨습니다.
불화의 세상을 화해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거룩한 소명임을 잊지 마십시오. 불화의 근원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내 안에 있는 불화의 원인을 알고, 내 안에 있는 어둠을 알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우리는 ‘다리는 놓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화해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은 한 해의 상반기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화해자로 살아가셔서 맥추감사절로 시작되는 하반기의 예배가 하나님개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길 빕니다.

[거둠 기도]
막힌 담을 헐고, 분열된 것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동족상잔의 비극이후 73년을 살아가며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가는 이 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또한, 우리의 삶에서 화해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불화의 주체로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형제자매와 화해하라 하신 주님,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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