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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2주]코로나블루 시대를 극복할 감사와 용서

  • 관리자
  • 2020-09-1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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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2주(2020년 9월 13일)
코로나 블루시대를 극복할 감사와 용서
마태복음 18:21~35



‘코로나로 인해 우울증’에 빠진 이들이 많아지면서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K방역으로 ‘코로나 19’가 진정세로 돌아가는가 싶었지만, 광화문 광복절 집회와 사랑제일교회발 확진자의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까지 시행되었습니다. 한남교회도 지난 3월부터 10주간, 8월 말부터 3주간 째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코로나확산의 진원지가 되면서 코로나 19가 진정된다고 해도 한국교회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코로나 초기에는 신천지가 비난의 표적이었지만, 지난 8월 이후 교회가 비난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비난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던 때에도 원정예배를 드린다거나, 편법으로 대면예배를 드린다거나, 고발을 당하면서까지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목사로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송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말씀중심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목사에게 설교는 그야말로 생명과도 같습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목사는 최선을 다해 준비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교인들과 피드백하면서 힘을 얻고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목사로서 비대면 예배가 힘든 것은 이런 과정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간들이 일상이 되다보니 목사 주변에도 ‘코로나 블루’가 어슬렁거립니다. 신천지로 인해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비대면 예배를 드렸을 때에는 너무나 황당해서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원인이 되면서, ‘신천지보다 못한’이라는 수식어가 달리자 제 주변에도 ‘코로나블루’가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들을 향해 분노하고, 손가락질이라도 했는데, 이젠 분노하고 손가락질한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된 후 처음으로 겪는 일로 일상이 흐트러지고, 코로나 19가 장기화되고, ‘코로나 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에 마음이 우울해졌습니다.
 


이때 돌파구가 된 것이 ‘감사일기’입니다.

‘긍정 심리학’의 대부로 알려진 ‘마틴 셀리그만’의 책들을 읽으면서 그가 제시하는 방법을 실행해 보았습니다. 그가 제시한 방법 중 하나는 ‘하루에 감사한 일 세 가지를 적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문장으로, 구체적으로’라는 것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와 책과 배철현 교수의 <승화>라는 책을 통해서 ‘오늘 하지 말아야 할 일 한 가지’를 추가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목양실에 나와 감사일기장을 폅니다.

먼저,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나 적습니다. 왜 ‘할 일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일’이냐면, 현대인들은 늘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의무가 생기고, 삶이 무거워집니다. 그런데 ‘하지 말자’는 안하면 되는 거니까 큰 부담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일을 한 문장으로 적고, 왜 감사한지 구체적으로 씁니다. 감사는 하나인데 구체적으로 쓰는 과정에서 또 다른 감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30분 정도 감사일기를 쓰다보면 어느새 우울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어떤 날 감사일기 일부입니다.

오늘 하지 말아야 할 일 : 화 내지 말기
감사한 일 : 오늘 아침에 사과 한 알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감사한 이유:
사과의 맛이 신비롭습니다.
사과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미각이 있는 것이 감사하고,
사과를 키워 식탁에 올리기까지 수고한 그림자노동이 감사하고,
사과 정도는 사먹을 수 있는 집안 살림도 감사하고,
기꺼이 내 몸에 모셔지는 사과의 희생도 감사합니다.
저마다 과일 맛이 다른 것도 감사하고,

사과 한 알 속에 들어있는 바람과 햇살과 별과 비와 그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사과 알레르기가 없어 그를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몸도 감사하고,
소화되어 내 몸에 에너지를 주니 또한 감사합니다.
게다가 사과가 먹음직스럽게 예쁘게 생겼으니 감사합니다.

 


사과 한 알 먹은 것을 감사했을 뿐인데, 그것을 구체화해보니 내 삶 전체가 감사합니다. 사과 한 알이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수고한 모든 것들이 감사합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 코로나 블루시대, 우리의 정신건강을 지켜줄 ‘멘탈 케어’는 감사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의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창조절 두 번째 주일 성서일과는 마태복음 18장 21~35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 형제가 자꾸만 나에게 죄를 짓는다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이런 내용일 것입니다.
“예수님, 나를 괴롭히고 속상하게 하는 형제가 있는데 몇 번이나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저를 괴롭히고 속상하게 합니다.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만큼 참고 용서해 주었으니 이젠 화를 내고 분노해도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여, 일곱 번 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십시오.”

일곱 번도 쉽지 않지만,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라는 말씀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냥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일곱 번 용서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해서 상처입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지요. 사실, 490번이 아니라 일곱 번만 용서해도 용서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490번이 너무 어렵다면, 최소한 일곱 번만 용서하십시오. 그 사이 용서로 인한 치유의 기적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하는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왕이 셈을 하는 중에 만 달란트 빚진 종이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빚진 종이 참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왕이 그를 가엾게 여겨서 빚을 전부 탕감해 줍니다. 기분이 날아갈 듯했을 것입니다. 만 달란트를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1데나리온이 일용직 노동자의 일당이고, 1달란트는 1데나리온의 6천배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요즘 일용직 노동자 시장의 일급을 대략 9만 원 정도로 계산한다고 해도, 1달란트의 가치는 일용직 노동자 6천명 분에 해당하는 금액이니 5억 4천만 원이고, 일 만달란트는 5조 4천억입니다. 그러니까 만 달란트는 ‘도저히 값을 수 없는 빚’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채무자를 만납니다. 그러자 그는 빌려준 돈을 내놓으라며, 채무자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그를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백 데나리온은 위의 방식대로 환산하면 9백만 원 정도입니다. 5조 4천억을 탕감 받은 사람이, 9백만 빚진 자가 갚겠다고 하소연하는데도 형무소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그 일을 왕에게 알립니다. 왕은 그를 다시 붙잡아 와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결국, 왕은 그를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형무소에 가두어두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무기징역’인 셈입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비유이야기는 ‘하늘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죄는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큰 것이었는데, 우리가 그 은혜를 잊고 용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용서도 무효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산이나 들보만큼의 엄청난 죄를 용서받고도 겨자씨나 티와 같이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늘나라를 거부하고 지옥을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용서하지 않으면 누가 가장 먼저 상처를 받을까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상대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마음을 헤집어 놓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그 사람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면, 먼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이 지옥이 됩니다. 용서와 화해는 다릅니다. 화해는 쌍방의 대화와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지지만, 용서는 개인의 차원입니다. 내가 용서해 주었어도 상대방은 계속 상처 입히는 짓을 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순간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지속해서 그 사람이 내 마음을 헤집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그들에게 맡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지난해 창조절 성서일과도 ’용서‘와 관련된 말씀이었습니다.

창조절 둘째 주일에 마태복음 6장 9~15절의 말씀으로 ’용서의 깊은 심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고, 셋째주일에는 ’자신을 용서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는 죄를 안 짓고 사는 것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용서와 관련해서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남들은 다 용서해도 나는 용서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상처를 받으면 “왜, 내가 그런 상처를 받도록 행동했을까? 상처받은 내가 바보지, 그런 나를 용납할 수 없어, 다 용서해도 나는 용서가 안 돼!” 이런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우울증이 옵니다. 지난 9월 8일 국민일보 기사를 보고 제가 우려했던 일이 너무 빨리 와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기사 제목은 ’수도권2030 여성들이 위험하다. “극단 선택 급증”‘이라는 기사입니다. 소위 ’코로나블루(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자기 사랑‘을 멈추게 합니다. 이런 블루시대에 우리는 레위기 19장 8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

 

그렇습니다.

이웃사랑과 자기 사랑인데, 이웃을 진정 사랑하려면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법이고, 복음의 모든 진리도 이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크로나블루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백신은 감사와 용서입니다.

일상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훈련을 하시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마시고 용서하십시오. 지난 해 효과적인 용서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얼마나 실천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1. 베개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앉으십시오.
2. 증오심에서 벗어 한을 풀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리십시오.
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4. 상처를 준 사건 속에 예수님을 초대하십시오.


베개의 용도를 알려드리면, 분노가 극에 달하고 참기 어려우면 주먹으로 상처를 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베개를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는 여기에 하나를 더하고자 합니다.
 

5.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나누겠습니다.

코로나 블루시대를 극복할 코드 두 가지는 ’감사와 용서‘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잘하면, 우리의 삶은 하늘나라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산술적인 의미와는 관련이 없지만, 나와 이웃을 열 번만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이미 성숙함을 이룰 것입니다. 코로나블루시대, 온통 우울한 소식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지만, 감사와 용서로 새 길을 찾아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없는 주님의 은총을 받고 누리기만 하고, 우리의 이웃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 욕심에만 빠져 살아온 결과로 지금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깊이 새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크로나 블루가 우리를 어둡게 합니다. 하오나 주님, 말씀을 통해서 ’감사와 용서‘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감사가 넘쳐나게 하시고, 누군가를 미워함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용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창조절에 우리도 새롭게 창조되게 하시고, 속히 온 교우가 한 자리에서 기쁨의 예배를 드리는 날이 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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