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성령강림후10주]기도는 나침반입니다

  • 관리자
  • 2020-08-09 11:00:00
  • hit3198
  • 222.232.16.100

성령강림후 10주(8월 9일)
기도는 나침반입니다.
마태복음 14:22~23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주 시기를 축복합니다.
 


혹시,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예, ‘기적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제목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시려고 배를 타고 빈들로 나가셨지만, 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나누었습니다. 복습하면, 기적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부터 시작되고,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적인 변화를 동반합니다.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는 재촉하여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들을 헤쳐 보내십니다. 본문에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고 짧게 전하고 있지만, 이 짧은 말씀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재촉하여’라는 말씀입니다.

 

 

헬라어 ‘henarkasen’은 직역하면 ‘강요하여, 억지로 하게 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기 싫어하며 머뭇거리는 제자들과 군중들을 억지로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오병이어 기사를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후 무리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6:15). 제자들 역시도 군중심리에 휩쓸려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더는 빵 문제로 고민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고, 제자들의 마음은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대감으로 술렁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촉하여‘ 제자들과 무리를 흩어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군중과 제자들의 요구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받았던 유혹자의 세 번째 유혹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 번째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유혹자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네가 엎드려 나에게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과 군중들이 유혹자가 되어 예수님을 왕으로 삼겠다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은 단 한 번의 유혹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유혹자의 세 가지 유혹은 평생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순간까지도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다!”며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평생 흔들리면서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늘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까?
 


이렇게 흔들리는 순간, 중요한 결단의 시기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럴 때면, 지체하지 않고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뤄 가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기도’에 관한 글을 읽으며 정리한 세 문장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접속시키는 것이다. connect
기도는 내킬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는 것이다. always
기도는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same

이 문장들이 제게 와 닿았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늘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이어가시고, 그 바쁜 와중에도 항상 기도하시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시기 위해 기도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이렇게 하시는데, 나는 너무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했습니다. 반성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예수님조차도 순간순간 유혹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보다도 더 심한 유혹의 덫에 빠져 살아갑니다.

돌덩이로 떡을 만들 수 있다면 만들고 싶어 하고, 기적을 통해 유명세를 타고 싶어 하고, 세상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마귀에게 절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 살아갑니다. 이런 유혹들을 두려워하기보다 “왜, 나에게는 그런 유혹이 없지?”하며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유혹하기만 하면, 바로 넘어갈 텐데.’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로 살아가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될 때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 분들 되길 바랍니다.

 

둘째, ‘산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산이 의미하는 바는 광야, 빈들, 척박한 곳, 외딴 곳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는 광야였고, 빈들이었으며, 산이었고, 외딴 곳이었으며 심지어는 십자가 위였습니다.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수님의 골방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시는 골방을 가지고 계십니까? 기도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도처는 반드시 광야나 빈들이나 산일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가 기도처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집이 기도처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터가 기도처요, 일터로 향하는 시간 대중교통, 운전하는 곳이 기도처요 골방일 수 있습니다.
 


아침 8시 30분 경, 동호대교북단에서 압구정동 방향으로 출퇴근 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을 보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두어 번 본 적이 있고, 버스를 타고 동호대교를 건너 출근하는 큰 딸은 자주 본다고 합니다. 오토바이로 부부가 출근하며 동호대교를 건너는데, 남편이 운전을 하고 아내는 뒷자리에 앉아 남편 등에 책을 펴고 읽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의 등은 책상이요, 오토바이는 도서관인 것입니다. 학교에 있는 도서관이 물리적 공간이라면, 독서에 몰두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은 삶의 자리에 있는 도서관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골방기도’가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쿰란 공동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유대교 에세네파가 기원전 150~68년 사이에 독특한 복장과 엄격한 규칙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하며 금욕생활을 하던 동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로마제국에 항거하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만, 로마제국에 의해 멸절되었습니다. 쿰란 공동체가 사용하던 동굴에서 사해문서도 발견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들이 생활하던 동굴들이 남아있었기에, 동굴기도는 하나의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 혹은 작은 밀실, 혹은 동굴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개인이 1대 1로 만나는 모든 곳을 ‘골방’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골방은 요란한 곳을 피하여 가신 빈들이기도 했고, 산이기도 했으며, 광야이기도 했고 외딴 곳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골방이 있어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만의 골방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1대 1로 대화하는 기도의 골방을 마련하셔서 은밀한 중에 들으시고, 갚아주시며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셋째, ‘홀로 거기에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개인의 간절한 기도는 ‘홀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1:1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살다보면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곳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가능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나의 가능성을 놓아버리고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면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말은 쉬워도 생각을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하라.”


백척(百尺)의 100은 ‘가장 높음’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여기서 백척은 대나무나 장대의 끝이며, 벼랑의 끝을 의미합니다. 간두(竿頭)란, 빨랫줄을 높이 올리는 긴 막대기나 장대의 끝입니다. 거기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그것을 놓아버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새처럼 날 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간두를 놓아버리고,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것은 ‘죽으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려면’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기도였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는 벼랑 끝에서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홀로 기도하시는 시간은 예수님의 행동은 유혹자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터이니 나에게 절하라!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을 다 놓아버리고 한 걸음 더 걸어가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만의 골방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뿐 아니라, 나의 가능성에 매달려 살지 말고,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홀로 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물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재촉하여 제자들은 배에 태워 육지로 보냈는데 거센 바람으로 인해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때는 ‘밤 사경’이었는데 새벽 3~6시 사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밤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홀로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아시고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십니다. 바람 때문에 놀란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무서워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하십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맞는다면 “나에게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합니다. “오라!”하시니, 베드로도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갑니다. 잘 걷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자 다시 두려워하고 물에 빠져 구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하시며 그를 구해주십니다.
 


바람이 상징하는 바는 세상입니다.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항해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움에 빠져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의 풍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면 그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길이 열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만 바라볼 때에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바라보자 빠져버립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풍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이 아니라 물 위를 걷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나 이런 삶을 원해도 우리는 베드로처럼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갑니다. 그때 누가 손을 잡아 주십니까? 예수님께서 허우적거리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듯,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개인사뿐 아니라, COVID-19, 지구온난화, 오존층의 파괴와 생태계 파괴, 기후 변화 등 우리를 두렵게 하는 바람은 태풍 급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도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나침반 없이 항해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는 나침반입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산다 해도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줄기를 흔드는 바람이 있기에 뿌리 깊어지는 것입니다. 흔들리면서도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예수님을 향한 지향점이 분명하면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우리는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한 주간 이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