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성령강림후7주]루스를 벧엘로

  • 관리자
  • 2020-07-19 11:00:00
  • hit4675
  • 222.232.16.100

루스를 벧엘로(7월 19일)
창세기 28:10~19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족장 야곱의 행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입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고향땅과 아비를 떠난 아브라함이나 온유한 성품을 지니고 있던 이삭과 비교해보면 야곱은 많은 단점을 가진 인물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목을 잡고 태어났을 뿐 아니라, 에서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붉은 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형 에서로 위장해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고, 보복이 두려워 하란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삭은 장자의 축복권을 가로챈 야곱의 무례와 간사함에 분노했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뤄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먼 길을 떠나는 야곱을 합법적인 언약의 계승자로 축복하면서 가나안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들 가운데 아내를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은 자, 빼앗은 자’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야곱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태도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며 살아갈 수 없기에 정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야곱은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갔습니다. 형 에서의 분노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기에 하룻길 만에 브엘세바에서 90km 지점인 루스에 다다랐습니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돌베개를 베고 허허벌판에서 잠이 들고, 잠자는 중에 꿈을 꿉니다.

 

꿈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 중 하나였는데, 야곱은 ‘사다리의 환상’을 봅니다. 이 사다리 환상은 얍복 강 씨름 사건(창32:22~32)과 함께 야곱 생애의 극적인 전환점을 이룬 중요한 사건입니다.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에 사다리가 세워져 있는데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있었습니다(12).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내리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너무도 생생한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셨는데 알지 못했다는 것’에 기인했습니다. 그리하여,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의 옛 이름은 ‘루스’인데 ‘편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지명을 통해서 루스지역에 ‘편도나무’가 흔한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도나무는 살구나무라고도 번역되는데, 정확하게는 아몬드나무라고 합니다. 아몬드는 살구 씨를 닮았습니다. 이런 연관성들이 있습니다만,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나무냐가 아니라 루스에 ‘흔하디흔한 편도나무처럼 ‘루스’라는 지역은 평범한 지역이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범하던 일상의 장소 루스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후 ‘벧엘’이라는 아주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나 야곱의 개인사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새겨야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는 것에 그친다면,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이 차라리 우리에게는 유익할 것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에는 항상 그 속에 들어있는 의미와 상징을 우리의 것으로 축출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두 야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하면,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축복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야곱을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서일과 병행본문인 로마서 8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야곱이 루스를 벧엘로 삼았던 것과도 같은 정화과정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하나님의 상속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루스, 돌베개가 상징하는 바는 ‘광야’와 다르지 않습니다. 새롭게 거듭나려면 ‘광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필요했고, 예수님조차도 ‘광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광야의 시간’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의 시간을 통해서, 오롯이 하나님만이 구름기둥이시고, 불기둥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의 시간을 통해서 오롯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간이란, 나를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이런 정화의 시간 없이 루스가 저절로 벧엘로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광야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온통 정신이 팔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헌신하는 일은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바로 최소한의 광야의 시간을 사는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그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둘째, 사닥다리가 땅에 세워져있다는 것입니다.

사다리가 용도대로 쓰임을 받으려면 땅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꼭대기는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땅’과 ‘루스’가 상징하는 바는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매일매일, 흔하디흔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하루’입니다.

COVID-19로 일상이 무너진 경험을 한 이후, 우리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하루’라는 사진에세이집에서 ‘하나의 물방울이 온 하늘을 담고 있듯 하루 속에는 영원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루’에 감동하고, 감사하고, 하루를 감내할 줄 하는 사람만이 하루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는 어제 혹은 내일도 이어질 당연한 하루가 아닙니다. 하룻밤 사이, 루스는 벧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다리가 땅에 세워졌을 뿐 아니라, 하늘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가 하늘, 즉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도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느꼈던 ‘두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포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체험 중 가장 본질적인 감정으로 ‘누미누제(거룩한 경외-Rudolf Otto)’입니다. 모세, 욥, 이사야, 베드로, 요한, 사도 바울 모두 ‘누미누제’를 경험했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함으로써 인간을 정화시키고, 성화시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늘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땅과 하늘’, 모두 소중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을 이분법으로 나눠서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종교는 건강한 종교가 아닙니다. 땅과 하늘의 합일, 일상의 삶과 신앙의 삶의 합일,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삶이요, 지향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벧엘은 루스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이 고백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참으로 여호와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알지 못했구나.
이곳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곳이 하늘의 문이구나.”

이곳이 어디입니까? 루스입니다.

우리는 ‘벧엘’에 익숙해서 ‘루스’를 잊고 살아갑니다. 루스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만 바라보다 발 딛고 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만 있습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왜 우리는 마치 타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둬놓았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발 딛고 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성전에 가둬놓고 자신들의 일상에서는 하나님 없는 듯 살자, 바벨론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땅에서 나라 뺏긴 백성으로 살아가게 했습니다. 맨 처음에 이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었으니,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런데 머지않아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계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리하여 광야의 시간, 고난의 시간이었던 바벨론 포로기를 그들의 신앙을 세우는 계기로 삼습니다. 구약성서 대부분이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신앙은 지금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는 신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모든 곳은 ‘루스’인 동시에 ‘벧엘’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집인 우리 마음에 온갖 세상의 욕심과 편견을 가득 채우고 껍데기만 주님의 전에 나와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한남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집에서 예배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 우리는 지금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갑니다. 이 땅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은 하늘과 이어진 사다리를 세우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사다리를 잘 세우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내리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을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함께 찬양한 후에 거둠기도로 말씀을 마칩니다.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삶에 가득히 넘쳐날 거야

너는 어떤 시련이 와도 능히 이겨낼 강한 팔이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와 언제나 함께하시니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나는 널 위해 기도하며 네 길을 축복할 거야

너는 하나님의 선물 사랑스런 하나님의 열매
주의 품에 꽃피운 나무가 되어줘.

 

[거둠기도]

하나님, 우리를 돌아보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실감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오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귀한 소명을 주심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일상을 잊고 살아갑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게 하시고, 루스를 벧엘로 만들어가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루하루 감사하고, 감동하고, 감내하며 살아가게 하시어 지금 우리에게 주신 선물과도 같은 삶을 살게 하시어, 야곱의 축복이 또한 우리의 축복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

http://www.podbbang.com/ch/1775820?e=23605724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