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누가복음 19:1-10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의 일입니다.
여리고 성은 예루살렘 동북 방면으로 약 30km지점에 있는 성인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당시 가나안 땅의 주요 거점 도시였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여호수아 시대 가나안 평균 성읍 정도의 크기였으나, 중요도는 굉장히 높았습니다. 여리고는 좋은 샘들을 많이 가진 ‘오아시스’지대였고, 전력상 매우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으며,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중심지로 가나안 정복 후에는 이스라엘로 상품이 들어오는 주요 통관소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여리고성 가파른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 밖으로 3~4M에 달하는 석조 장애물을 설치했기 때문에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접근하는 행위는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기간 포위작전을 구사하는 것이었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지체되니 가나안 족속이 연합하여 반격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은 전쟁이 나면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는 작전을 구사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는바대로 여호수아 군대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법궤를 맨 제사장이 앞서고, 구 뒤를 따라 대열을 이루어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6일 동안 침묵 속에서 돌았고, 마지막 일곱 번째 날에는 크게 함성을 지릅니다. 그러자 성이 안에서 밖으로 무너지게 되었고, 여리고성은 이스라엘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이러한 여리고성이었기에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에게도 여리고성은 아주 중요한 성읍이었고, 주요 통관소가 있었기 때문에 여리고에서 세관업무를 담당한다는 것은 곧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여리고성의 세관업무도 로마의 식민정책에 따라 행해졌을 것입니다. 로마는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들이 직접 지배하는 대신 식민지 출신의 대리자를 세웠습니다. 부과된 세금을 바치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면 나름 종교적인 자유와 개별민족의 문화를 지켜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로마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을 차단한 것입니다. 대리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권력과 부를 제공해줌으로써 자신들에게 충성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세리는 로마제국이 매긴 세금을 거두어 로마제국의 국고의 기반을 다지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돈 문제는 어느 시절이나 민감한 문제였기에, 절대로 자신들이 직접 나서는 일 없이 식민지 백성 중에서 임명했습니다. 인두세 형식으로 세금을 책정하고, 그만큼의 수익만 들어오면 안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차질 없이 이 일을 수행하려면 충성스러운 세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관에게 특혜를 주었습니다. 정해진 세금만 바치면, 그 이상 세금을 부과해서 거둬도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월급을 주는 대신 초과해서 거둔 세금은 세관들의 몫으로 삼게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 세관은 로마에 부역하는 매국노 취급을 당했고,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족을 팔아 자기의 배를 채우는 이기적인 인간들로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서 그들은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동족을 착취했고, 그러는 만큼 동족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리고성에서 이 모든 세관업무를 총괄하는 세관장 삭개오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깨끗하고 정결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름과 걸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이름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를 향해 ‘좋아하네, 깨끗하고 정결하다고?’ 이랬겠지요.

삭개오는 로마에 부역하는 매국노 취급을 당했으므로 친구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주변에는 그의 돈을 필요로 하는 이들 뿐이었겠지요. 그것은 그에게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신체적인 장애가 더해졌습니다. 키가 작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보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려보지만, 군중들은 그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습니다. “넌, 예수를 볼 자격도 없어!”하듯 말입니다. 삭개오는 꾀를 내서 예수님의 일행이 걸어갈 길을 앞질러 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어릴 적 교회에서 삭개오에 관한 노래를 배울 때 ‘뽕나무 꼭대기로 올라갔어요.’라고 배웠는데, 정확하게는 ‘돌무화과나무’입니다. 어릴 적에는 나무에 올라가서 놀기도 잘하니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관장 삭개오의 나이는 어림잡아 40세 안팎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평균수명이 40세 이하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키가 작다는 콤플렉스도 있고, 사람들이 자기를 혐오한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인데 적당한 높이만큼 올라간 것이 아니라, 돌무화과나무 잎에 가려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못할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에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삭개오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군중’이 의미하는 바와 ‘돌무화과나무’입니다.
먼저 ‘틈’입니다.
이 세상은 ‘빈틈없는 삶’을 잘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빈틈’있는 사람이 좋고, 저도 ‘빈틈투성이’입니다. 빈틈이 없는 사람에게는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빈틈이 있는 사람은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다가가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폭염으로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스팔트 틈에 피어난 꽃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새 생명은 이렇게 틈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입니다. 꽉 막혀 강고한 세상에 틈을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이 새 세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틈’은 ‘여백’입니다. 여백이 없으면 삶은 건조할 수밖에 없고,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삭개오를 가로막으며 “넌 예수를 볼 자격도 없어!”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슬며시 빈틈을 만들어주는 그런 분들이 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일입니다.
다음으로는 ‘돌무화과나무’입니다.
식물이름에 ‘돌’자 들어가면 ‘보잘 것 없는 열매를 맺는 식물’을 가리킵니다.
돌콩, 돌배나무, 돌참나무, 돌창포, 돌외 같은 것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쓸 만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였지만, 삭개오와 예수님을 이어주는 소중한 매체가 됩니다. 저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나는 누구에게 돌무화과나무가 되어주었는가?’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돌무화과나무’입니까?. 제게 예수님을 이어준 돌무화과나무는 어머니와 아버님이셨습니다. 그분들은 유명한 분들도 아니셨고, 삶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신 분들도 아니셨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도와 신앙생활은 저에게 돌무화나무가 되어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더 나아가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 돌무화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다시 본문의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삭개오의 생각대로 예수님은 돌무화과 나무 아래로 지나가십니다. 나무 위에서 삭개오는 ‘저 분이 예수님이시구나!’ 뚫어지게 응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러 삭개오를 바라보신 후 “삭개오, 속히 내려오시오. 내가 오늘 당신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하십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러자, 삭개오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던 이들이 수군거리며 비아냥거립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거하러 들어가는구나!”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지요. 삭개오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던 사람들, 삭개오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미워하기만 했던 이들, 그러면서도 돈이 필요하면 삭개오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이들의 비아냥거림,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군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아냥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그냥 즉흥적으로 나온 말일까요? 세관장 삭개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욱여 쌓인 상황에서 아무런 돌파구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이었지만, 그가 뿌리를 내릴 그 어떤 틈새도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죄인에도 등급이 있었는데 ‘세리’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부류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며 식사도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의 큰 소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자신을 만나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돌무화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도 변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보려 하는가? 이 마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이렇게 결단하는 단초가 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따스한 시선’이었습니다. ‘그 곳에 이르자 쳐다보시고’, 여기에서 삭개오의 변화는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고, 냉랭했습니다. 적개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장황한 설교를 하신 것도 아니고,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따스한 시선을 잃어버렸습니다. 따스한 시선은 상실하고, 온갖 사랑과 복음은 말로만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행동들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비극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장황하지 않습니다.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죄송하지만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삭개오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기적 같이, 구원받을 만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삭개오, 당신이 구원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이 자녀가 되려면 당신의 소유를 절반을 나눠하고, 만일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야 할 것이요.’하고 설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기적처럼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이 자손임이로다.”
이렇게 예수님은 삭개오를 회복하심으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소명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누군가에게 틈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꽉 막힌 신앙이 아니라 낯선 것이라도 품을 수 있는 신앙의 품을 가지십시오.
누군가에게 돌무화과 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가교역할을 하십시오. 일단은 가족, 혈육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십시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시고자 하는 마음을 늘 유지하십시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말보다는 따스한 시선으로 이웃에게 나아가십시오.
따스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둠기도]
하나님, 삭개오의 마음속에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에 주님의 따스한 시선에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각박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도 누군가 뿌리를 내릴 틈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주님, 우리 이웃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길을 통해서 사방 욱여 쌓인 것과도 같은 각박한 세상에 틈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분열되어 갈등하는 곳에서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게 하시며, 나의 눈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