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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4주]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

  • 관리자
  • 2020-06-28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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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4주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
마태복음 10:40~42
 


예수님 당시 로마 식민지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자존심이자 정체성을 상징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계명이고, 하나는 건물입니다. 어떤 계명이고, 어떤 건물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이요,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뿌리를 뒤흔드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누구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분이 오셔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당시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율법체제를 뒤흔드는 불순한 말이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온 이후 46년이라는 긴 시간 공들여 지은 성전을 두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 2:19)”

그러니 자신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두 요소를 부정하는 말에 유대인들은 불편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 불편함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토록 메시아를 갈망하면서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과 성전체제를 공고화하던 이들, 그것을 바탕으로 로마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나름 부유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로니 당연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불편했을 것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지렁이 백성들 역시도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전체제와 율법을 위협하는 죄인들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물론이요,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체제 수호자들과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나름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미움 받는 이들을 환대한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고, 가진 자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11~14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이를 맞아들이는 것이다(마 10:40).”

 

‘맞아들인다.’는 말은 단순히 집으로 모신다는 뜻을 넘어 ‘그들의 사역을 인정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권력자들과 로마제국의 비호를 받던 이들이 불편하게 여기던 상황임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인정하고 맞아들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냄은 받은 자(40)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자를 대표합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이 곧 예수님의 위임을 받은 대리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대리자이시니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위임장을 받은 사람은 곧 위임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40절의 말씀을 축약하면 ‘예수님의 제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냄을 받은 자는 선지자, 의인, 제자로 표현됩니다.

선지자는 ‘prophetes’ 즉 예언자요, 히브리어 ‘나비nabi’입니다.
구약성경의 ‘나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거나 그 뜻을 실천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초대교회에서 사도나 예언자는 아니지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신앙적인 삶을 실천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의인이라고 불리려면 최소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보다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나은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당시에도 여전히 종교지도층에 해당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하나님의 이름을 차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에만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초대교회를 핍박하던 이들은 로마제국이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신도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과 성전체제를 부정하는 이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초대교회에는 그들보다 선하게 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언자들을 핍박했던 선조들처럼 선지자들의 말을 부정했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을 받아들여 의로운 삶을 살아가던 이들을 불의한 자라고 낙인찍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 선지자나 의인을 영접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보냄을 받은 자’를 영접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40절에는 ‘보냄 받은 자’를 영접하는 이들과 영접하지 않는 이들이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접하면 상을 받고, 영접하지 않는 이들을 벌을 받을 것이다. 축약하면, 이런 말씀인 것이죠.
 


여러분, 오늘 날에도 영접 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누구를 영접하고 누구를 영접하지 않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이들을 영접하고 선지자나 의인이나 사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배척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COVID-19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천지나 이단이나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억울함도 있지만,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기 때문에 손가락질 당하는 측면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보냄을 받은 자’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영접해야 할 이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통의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의인들보다 저급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가짜뉴스의 온상이요, 혐오와 차별을 양산해 내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입니다.

 

▖ 작은 자(42)
 

 


마태복음에서는 놀랍게도 ‘작은 자mikros (pl)mikla’를 선지자, 의인, 제자들과 같은 반열에 위치시킵니다. 이 단어는 유대교에서 어린이, 사회적인 약자,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평신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돋보이는 신자들과 사도, 의로운 자들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외적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나 무명의 성도들을 지칭할 때 ‘작은 자’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렇게 ‘작은 자’들이 교회의 대다수를 이뤘기에 ‘큰 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작은 자’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서 이런 구별은 차별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교회직분에 따른 질서를 무시하는 말씀은 아니지만, 동시에 교회의 직분이 곧 세상의 권력이나 직분과는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봉사의 직분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받으면 받을수록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대언자라고, 마치 하나님인 냥 교주 행세하는 이들이 있는데, 아무리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도 멸망의 길로 교인들을 인도하는 맹인이요, 교인들은 맹인의 손을 잡고 가는 불쌍한 이들일 뿐입니다. 다른 교회의 직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도 나라도 교회도 ‘작은 자’들이 있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은 자를 냉대하고, 소홀히 여기는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42)
 


‘냉수 한 그릇’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적은 봉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과 교회 일에는 큰 봉사도 필요하지만, 작은 봉사도 필요합니다. 작은 봉사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큰 봉사를 하실 수 있는 분은 큰 봉사를 하십시오. 작은 봉사를 할 수밖에 없는 분은 작은 봉사를 하십시오. 자기 능력에 걸맞게 봉사를 하십시오. 너무 과하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이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봉사의 손길이 있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작은 봉사의 손길 하나가 빠지면,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배에만 참석하셨어도 상 받을 봉사를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가 아무리 양적인 부흥에 무관심한 것 같아도 마음속에는 더 많은 분들이 예배하기를 원하는 속 좁은 목사입니다. 그래서 한 분이라도 더 오시면 설교도 힘이 붙고, 자리가 썰렁하면 맥이 빠집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은 잃지 않을 상 받으실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관심을 갖고 교회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봉사해야할 것이 보일 것입니다. 조금 더 보완하고 고치고 더하면, 더 좋을 터인데 하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실 때에는 언제든지 의견을 주시고, 봉사하십시오. 봉사하시는 분이 상 받는 일이므로, 저는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하겠습니다.
 


그런데 ‘냉수 한 그릇이라도’에 담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 사막에서는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위한, 낯선 자들을 향한 ‘아주 작은 봉사와 헌신’은 곧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행하시는 선행, 아주 작은 봉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는 ‘냉수 한 그릇’이 없어 절망의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냉수 한 그릇만’있으면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 한 그릇’ 나누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누구도 “냉수 한 그릇도 대접할 수 없었어요!”라고 핑계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면 사막에서 ‘냉수 한 그릇’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기는커녕, 빼앗는다면 그는 상이 아니라 벌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문장을 바꿔보았습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0:42b)

이 말씀은 동시에,
"낯설다고 누군가를 혐오하고 증오를 유발하는 이들에게 화답하는 이들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날씨가 무덥습니다.

그러나 폭염보다도 더 우리를 갈증 나게 하는 것은 냉수 한 그릇을 나누는 마음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냉수 한 그릇 나누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삶입니다. 맑고 고요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어,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나눠야 할 곳이 어딘지 발견하시고 봉사하십시오. 교회도 여러분의 헌금을 ‘냉수 한 그릇 나누는 마음’으로 귀한 곳에 사용해서, 여러분의 헌신이 여러분에게 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거둠 기도]

주님은 낯선 사람으로, 가장 소외된 이들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이렇게 오시는 주님을 박대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주님, 나의 작은 봉사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교회공동체를 살리는 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또한, 작은 불평과 무관심이 생명을 죽이고, 교회공동체를 죽이는 일이 될 수 있음도 기억하게 하시어,
우리의 작은 행동거지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살게 하시고,
한남교회를 붙잡아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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