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2주(20200614)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니다
로마서 5:1~8
“움직일 수가 없어요! 배가 아파, 아프다고! 물 좀 주세요, 제발, 제발......숨을 쉴 수가 없어요.”
지난 5월 25일,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지면서 남긴 말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숨을 쉴 수가 없어요.’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계모에 의해 가로 44cm 세로 60cm 캐리어에 7시간이나 갇혀 있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8분 45초에 비하면, 엄청난 7시간을 좁은 캐리어 안에서 목이 꺾인 채 숨도 못 쉬고,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한 어린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흑인과 어린 아이를 이렇게 비참한 죽음으로 내몬 이들은 아마도 그들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기에 제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취급을 받으며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아프다고 외쳐도, 힘들다고 해도 누구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는 이들, 열심히 살아도, 최선을 다해도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도 없이 침묵하시고, 자신이 당하는 아픔을 하나님조차도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 아무리 외쳐도 누구하나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 처한 이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원망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없으신가요?
민중의 아버지와 한(恨)
80년대 암울한 상황에서 대학가에서 불렸던 노래 중 ‘민중의 아버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후에, 안치환 씨가 노래해서 많이 알려진 노래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를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늙으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이 노래를 만든 김흥겸 전도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81학번으로 동기들 중에서 교수가 나온다면 가장먼저 교수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수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흥겸 전도사는 도시빈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대변하는 삶을 살다 위암발병으로 1997년 36살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당시 보수 기독교인들은 ‘혀 짤린 하나님, 귀먹은 하나님. 화상당한 하나님’같은 구절이 들어있다고 해서 이 노래를 불경시했습니다만, 이 노래는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이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절절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부재. 이런 경험을 하지 않고 깊은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문동환 목사님은 <아리랑고개의 교육>이라는 책에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서로 ‘한(恨)’을 꼽습니다. 맺힌 한을 풀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으니, 한풀이는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구구절절 한 맺힌 삶을 살아오던 우리 민족이었기에 ‘복음’이 어렵지 않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움직일 수 없고, 숨 쉴 수 없고,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아무리 아프다고 외쳐도 그 누구하나,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외면하시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으며, 지금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서일과(성령강림 3주)
오늘 본문으로 삼은 로마서 5장의 말씀과 함께 주어진 성서일과 병행본문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18장 1~15절과 21:1~7절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나그네 셋을 영접한 후, 아들을 약속받는 내용과 사라가 이삭을 낳았다는 내용입니다. 아기를 낳기 전의 ‘사라’, 고대근동 사회에서 자식 없는 여인은 제 아무리 남편이 사랑해준들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고 낳아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2~8절 상반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3개월 지난 시점에 시내 산으로 모세를 불러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나라로 삼아주시며, 모세와 백성에게 “내 언약을 지키겠느냐?‘고 묻는 장면입니다.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았던 히브리 역시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10장 8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기진해 병들고 약한 이들, 더러운 귀신 들리고, 병에 걸린 이들, 잃어버린 양’ 으로 표현되는 이들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아 위임받은 일을 하던 제자들 역시 ‘공회에 넘겨져, 회당에 채찍질을 당하니’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 취급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님에도,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당하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회복’해 주시며, 너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선언하십니다.
용서와 화해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와 구원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화목)’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용서가 일방적인 시혜의 차원이라면, 화해는 쌍방 간의 일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화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 인간을 이해하고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도 하나님을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발버둥 치며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힘썼지만, 이 사회에서 소품처럼 사용되고 버려졌던 자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접고 이해해줘야 할 부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성서의 히브리 노예들이나, 예수님 당시 천대받던 암하렛츠 ‘땅의 사람들’, 복음을 전하다 처참하게 순교한 이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했던 유태인들, 캐리어에서 죽은 어린 아이, 경찰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플로이드, 인간의 횡포에 멸종되어가는 동식물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당하며 스러져가는 것’들이 이런 불합리한 세상임에도 침묵하시고, 그들이 그냥 그 아픔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이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신앙을 지켜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시라도 이런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으니, 자신을 원망할 수 있는 이들에게 '화해'의 통로로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도 그 고통을 알고, 그 고통에 함께했고, 그 고통으로 죽는다. 그러나 이제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이제 나를 원망하지 말고 나를 이해해주고 화해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자."
하나님이 화해를 청한 대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사랑의 신호를 받은 사람들이 반응할 차례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용서해 주시고가 아니고, 화해하게 하시고,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시고 화해의 직분을 맡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이 너무 힘들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이들에게 화해의 통로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로 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보내셔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당하는 폭력과 수치를 고스란히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화해의 길로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가장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아무것도 아닌 이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나사렛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나 갖는 직업인 목수생활 끝에, 아무것도 아닌 이들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시다가,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나 당하는 십자가형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에게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후에,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아무것도 아닌 이들을 제자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들에게 ”너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않을 때에 그스도께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6~8).”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손을 내미셨고, 이제는 우리가 손을 내밀 차례인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 내미는 증거를 로마서에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 환난 중에 인내를 이루고, 인내를 통해 연단을, 연단을 통해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롬5:3~5)’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고, 외면하시는 것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내팽개쳐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이나 외면이 아니라, 인간의 침묵이요, 외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롬5:5)’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의 아픔과 질곡은 인간의 책임이요, 하나님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전가하면 안 됩니다. 김흥겸 전도사의 ‘민중의 하나님’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뿐인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여러분,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로 오셔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고, 그분에게 소망을 두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시는가?’ 회의가 찾아올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거듭 말씀하시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인내를 이루고, 인내를 통해 연단을, 연단을 통해 소망을 이루는 삶(롬5:3~5)’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