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성서일과(성령강림후 1주/환경주일)
사람이 무엇이기에
시편 8:1~9(창 1:1~2:4, 고후 13:11~13, 마 28:16~20)
오늘은 성령강림후 첫번째 주일이자 환경주일입니다.
요즘 인류는 ‘COVID-19’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하는 석학들은 COVI-19보다 더 강력하게 인류를 위협하는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고 합니다. 공통적으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재앙’은 지금 인류가 삶의 양식을 지금 당장 변화시키지 않으면 수십 년 내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합니다.

2020년, 보도에 따르면, 인류의 최후 시점까지 남은 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지구 종말시계가 종말을 뜻하는 자정 100초전으로 당겨졌습니다. 매년 미국 핵과학자들이 준비하는 것인데 이 시계가 마련된 이후 지구 종말에 가장 가까운 시간에 접해있다고 합니다. 지구 종말 시계가 100초 밖에 남지 않은 이유로 꼽은 것은 핵무기개발과 지구기후의 변화입니다. 지구온난화는 무분별한 개발과 제국문명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인류 문명이 시작되기 전 1/3이었던 숲이 지금은 1/10밖에 남지 않았고, 숲의 소멸과 침식으로 인해 사막화가 가속화되고, 생명을 품을 수 없는 사막의 확산은 결국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인류는 자신들의 운명이 달린 환경과 생태의 문제에는 별반 관심이 없고, 전쟁, 이데올로기, 정치, 혁명, 전쟁 같은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서북부 오리건 주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윌리엄 코기’는 <제국 문화의 종말과 흙의 생태학>이라는 책에서 ‘지구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구의 흙이 복원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국기가 어느 나라 국기인지 아시는지요?
레바논 국기입니다. 국기에 있는 초록 나무는 ‘삼나무’로, 성경에 ‘레바논 백향목’이라 불리는 나무입니다. 레바논은 알파벳을 최초로 사용한 페니키아 문명의 터입니다.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삼나무로 만든 갤리선으로 당시 문명의 대양이었던 지중해를 누볐습니다. 그리하여 한때 서구 문명의 요람이었던 지중해 연안을 재패했습니다. 솔로몬 왕도 레바논의 삼나무를 가져와 예루살렘 궁전을 지었고, 이집트도 레바논의 삼나무를 수입해 배를 건조했습니다.

나일강 델타의 곡물들은 갤리선에 실려 그리스와 로마로 운송되었습니다. 갤리선을 앞장세워 로마를 공포에 빠뜨린 한니발 장군도 페니키아인이었으니 삼나무 없는 페니키아 문명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간 계속된 벌채로 지금은 흔적도 없고, 레바논 국기 속에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페니키아뿐만 아니라, 나무가 사라진 곳에서 문명은 황폐해졌습니다. 사막화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모두 울창한 산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속적인 남벌로 숲이 사라지고, 흙이 유실되어 사막화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프랑스, 벨기에, 독일까지 점령하여 목재를 확보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나중에는 식량 운송선 확보도 제대로 하지 못해 게르만인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숲이 사라지고, 나무가 사라진 곳마다 흙이 유실되고 초록생명의 사라진 곳마다 사막화되는 상황에서 ‘흙’은 곧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동물을 빚으시고,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이야기, ‘흙에서 온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 3“19)’는 말씀은 모두 ‘흙 = 생명’이라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8편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화답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라고 노래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에머슨 홀 비문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그 존재를 기억하십니까? What is man that thou art mindful of him?”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설교제목은 여기에서 따 온 것입니다.

성서일과 병행본문 고린도후서 13장 11~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항상 기쁨 충만한 삶을 살아가며,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힘쓰고, 서로 격려하며, 마음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은 온전하지 못해도,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도, 심지어 나와 생각이 달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 마태복음 28장 16~20절의 말씀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자 할 때에, 성령께서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며 ‘제자들의 사명’을 확고하게 세우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8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음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숨결’을 통해서 생명을 주셨고,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창조의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게 사람을 창조하시고,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지 않는 특별함을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를 알면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설교제목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신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창세전에’라는 말씀이 이것을 확증합니다. ‘이 시간 너의 맘속에’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가사 중에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 얼마나 너를 사랑하시는지/너를 위해 저 별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고/아들을 보냈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바람과 별과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을 고백하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주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불과 언어와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질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런 특별한 선물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 온갖 험한 말로 이웃을 해하거나, 남의 생명을 해하는 자,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권력과 돈과 명예 등을 이용해서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다면 그 역시도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여기에 대한 답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주 귀하게 창조하신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특별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淨觀(정관)- 맑게 바라보기’가 필요합니다. 맑은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창조세계를 바라보면 ‘진실’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실’이 낯설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낯선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객관적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넓은 길’을 가라고 하는데, 진리의 말씀은 ‘좁은 길’을 가라고 합니다. 세상은 ‘해방’을 말하는데 진리는 ‘십자가의 멍에’를 지라고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높아지라고 하는데, 진리는 종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진리는 그것이 진리인지 증명되지도 않았으며, 진리는 속성상 ‘알 수 없는 신비’에 속하는 차원이기에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익숙한 길이 아니라, 낯선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신비의 측면과 현상의 측면인데, 신비의 측면은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요, 현상의 측면은 욕심을 가진 이들이 보는 것입니다. 현상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도 아름답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비요, 기적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현상의 세계를 있게 하는 현상 너머의 신비의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신비를 보겠습니까?
이렇게 신비의 세계를 보는 이들은 ‘감탄’합니다.
한 없이 작은 인간의 모습에 놀라고, 그 한 없이 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놀랍니다. 뭔가를 보며 ‘아!’하고 감탄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 있어도 감탄할 줄 모르고, 심드렁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만물의 조화가 너무 신비로운데, 그런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람과 햇살과 꽃과 냇물과 강물과 바다와 하늘과 구름, 철따라 피어나는 꽃, 숲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로움, 이런 것들에는 눈길조차 주지도 않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삼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인류문명은 ‘다스리고 정복하라(창 1:28)’는 말씀의 신비의 측면보다는 현상의 측면만 보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마음대로 파괴하고 정복하고,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오늘날 인류를 위기의 삶으로 내몰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초록별 지구의 종말도 100초 밖에 남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이 아주 특별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감탄하며 바라보는 눈을 갖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 34절에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구상 시인의 <마음의 눈을 뜨니>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마음의 눈을 뜬다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
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
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고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짝이 없다.
천지만물은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니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던 해와 달과 나무와 새와 들꽃과 작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눈을 뜨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눈이 열릴 때 비로소 이 땅은 하나님의 신비가 가득한 세상이 되고, 이 세상을 경탄하며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로 주셨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이웃을 주셨습니까?
환경주일에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고요하게 묵상하며, 하나님의 창조세계, 현상 너머에 있는 신비의 세계를 바라보는 가운데 진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진실이 낯설어서 당황하고, 그 길을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거둠기도]
창조주 하나님, 창세전에 우리를 향한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창조의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하오나 우리는 현상에만 눈이 멀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망가뜨리며 살아왔습니다. COVID-19는 물론이려니와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류의 위기는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고, 새 길을 열어주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음을 믿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존재로 창조해 주신 이답게 살아가겠습니다. 맑은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창조세계를 바라보겠습니다. 이때 우리의 눈이 온전히 뜨여, 하나님의 신비를 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들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이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