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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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7주]고난 중에 놀라지 말라(부활 7주일)

  • 관리자
  • 2020-05-27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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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에 놀라지 말라
베드로전서 4:12~14, 5:6~11


베드로전서는 네로 황제의 대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이나 직후인 A.D. 64년쯤 로마에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네로 황제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시작하자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계속되는 불같은 시험 앞에서 쉽게 좌절하고 믿음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던 소아시아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의 교회들과 그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그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하기 위해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했습니다.
 


오늘날은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더 많은 이들이 믿음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의 일환을 종교를 탄압하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 교회를 박해했을 때에 믿음의 행동과 신앙은 더 선명할 수 있었습니다. 무력으로 종교를 탄압할 때에는, 적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행위도 선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참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사탄이 교묘하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서 신앙을 구부러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질병이 있으면서도 고질병 환자인 것을 모른다”며 당시 변질된 신앙인들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변질된 신앙’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자신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품고, 자신의 누리는 모든 것은 믿음생활을 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의 기도는 온통 세상적인 성공신화를 추구합니다. 미국식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교회에는 ‘기복신앙’과 세상의 성공을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 ‘맘몬신앙’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뿐 아니라 신앙인으로 사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가짜가 진짜인 듯 행세하는 세상, 그리고 가짜를 진짜로 믿고 있는 세상에서 ‘참’이란 배척당하고, 비웃음 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에덴의 동쪽’이 하나님의 뜻이 편만하게 이뤄진 곳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고 가짜들이 판을 치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종된 세상임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안한 삶을 살아간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안의 근거는 이 세상이 준 평안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평안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준 평안은 고난의 시간이 오면 부끄러움의 시간, 고통의 시간이지만, 하늘로부터 온 평안은 고난 속에서도 당당한 시간, 기쁨의 시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는 한남교회 교우여러분은 하늘로부터 온 참 평안을 누리시는 분들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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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절일곱째주일입니다.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요, 다음 주부터는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서일과는 승천을 앞둔 주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두고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과 연결 지어집니다. 그래서 성서일과 복음서 요한복음 17장 11절에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 ‘그 날에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을 설명해 드린 바 있습니다.

무엇을 아는가?

‘아버지와 아들과 믿는 자 사이에 완전한 영적 일치가 이뤄진다는 것(20)‘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인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성령이 임하시면’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 힘쓰는 삶(요 1:14)’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 대하여 시편 68편은 ‘의인’이라 하시고, 그들의 삶을 도우셔서 ‘형통하게(시 68:6)’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일과의 맥락입니다.
 


그러나 이 형통함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형통함과 같지 않습니다. 기복신앙처럼 세상에서의 잘 됨을 복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폭군 네로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불구덩이와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처럼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의 ‘불 시험, 불같은 시련’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서신이 기록되던 시기(A.D.64)는 기독교 박해가 다소 완화되었지만, 이후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기독교 박해가 확대되면서,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불 질렀다는 누명을 씌우고, 그리스도인의 몸에 기름을 바른 후 불을 붙여 황제궁의 정원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불같은 시련(벧전 4:12)’은 이런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지만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복신앙’과 ‘맘몬신앙’에 빠진 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불같은 시련’이 올 때에 놀라지 말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 시련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니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 사용된 ‘동참한다’라는 단어는 현재형으로 ‘교제하다, 생사고락을 같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거쳐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이 서신을 읽는 이들이 받는 고난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니(13),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잘못 때문이라면 부끄러운 것이지만, 슬퍼해야할 일이지만, 옳은 길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당당한 일이고,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고난’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받는 고난은 부끄러운 고난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고난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고난의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마음을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씀은 베드로전서 5장 6절 이하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겸손입니다.

‘서로’에게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서로’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 ‘판테스παντες’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젊은이들 사이에 겸손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혈기왕성하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교만해져서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 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청년’의 때라고 이야기하고, 온갖 상술은 ‘안티에이징’ 죽, 나이 듦을 부정하고 젊어지는 것으로 소비자를 현혹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겸손’이 의미하는 바는 젊은이의 기상처럼 당당한 믿음, 신앙을 가지되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겸손하라’는 말씀은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타자에게 교만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불어 살라고 주신 모든 이웃에 대하여 겸손합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은 더불어 사는 법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인간이란 종끼리는 물론이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을 능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암 같은 종양체로 살아가고 있으며, 지구의 종말을 재촉하는 바이러스가 되어 살아갑니다.

서로에게 겸손하게 살아가야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복된 삶으로 들어가시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의 근심걱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믿는 자라고 해서 세상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다른 것은, 같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문제에 초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주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뭔가에 집중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세상의 말로 ‘필feel이 꽂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 외에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이 세상의 염려로부터도 자유로워질 것임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고난 중에 놀라지 않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근신하고 깨어있어야(8) 합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깨어있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대적하는 마귀들이 우는 사자들처럼 두루 다니는 세상에 취해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성공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깨어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거짓신화들과 대적하는 것, 그것이 깨어있는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집중하는 이들은 이 세상의 거짓과 맞서 싸우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세상의 거짓을 대적하시고, 의로운 싸움을 하는 이들을 지지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깨어있는 삶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아픔과 고난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도 다 당하는 고난입니다(9). 타인의 고난은 작아 보이고, 나의 고난은 커 보이지만, 우리 마음의 안경 때문에 자기의 고난이 가장 큰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요, 모두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끝이 아니라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깐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고난 중에 놀라지 마십시오.

고난 중에 계시는 교우들에게 베드로 전서 5장 10절의 말씀이 축복의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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