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6주/ 어버이주일(202300514)
열심히 선한 일을 하라
베드로전서 3:13~22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님의 존재가 비로소 가슴 먹먹하게 다가오는 때는 더는 이 땅에서 부모님을 만날 수 없을 때인 듯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대체로 돌이킬 수 없을 때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돌이켜 자신의 삶을 바꿀만한 때에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계신 분 중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 아직 유효하신 분들께서는 그 계명이 축복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처럼 부모님을 먼저 하나님 품에 안겨드린 분들께서는 ‘부모님처럼 공경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또한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드로전서 3장 13절에서 22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매주일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교회력성서일과에 따라 주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 새벽예배에서도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새벽예배를 3년여 가까이 쉬다가 한 장씩 읽던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인데 우연히 부활절 6주 어버이주일 성서일과로 설교준비를 하는 주간에 읽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뿐 아니라, 새벽예배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독서를 통해서, 성경읽기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성경말씀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다양한 방법으로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교회력을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할 때, 한남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을 주셨고, 함께 예배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주신 것으로 믿고 준비합니다. 그러다보면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들이나 생각들과 메모해 둔 글 중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입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죽음에 임박하여 쓴 유언장과도 같은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치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했는데, 예수님처럼 못 박힐 수 없다며, 자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네로 황제가 68년에 죽었으니 그 이전에 사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골방에 숨어있던 나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없었다면 그의 회심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30여 년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솔직해질 때는 죽음을 앞둔 순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유언’은 ‘유지를 받들어’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유언에는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무렵, 베드로와 바울은 간혹 논쟁했습니다.
논쟁을 하면 대체로 바울이 승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식자층에 속했지만, 베드로는 어부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선교를 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해야했던 바울에 비해, 베드로는 이미 받은바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선하다는 입장인 반면, 바울은 본질적으로 악해서 ‘칭의’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는 논쟁을 하고, 바울이 매몰차게 베드로를 나무라기도 하지만,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입니다.
바울은 지식인답게 논리적이지만 베드로는 현자처럼 솔직담백합니다.
바울서신은 읽고 주석하려면 수십 권의 주석서로도 모자라 지금도 끊임없이 주석하고 있지만, 베드로가 쓴 편지는 주석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바울과 베드로 중에서 베드로를 좋아합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은 신학적인 말이 아니라는 것이고, 신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씀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황금률은 수많은 종교와 도덕,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원칙의 하나로, '다른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는 윤리 원칙입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은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제12절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유대교에서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 힌두교에서도 “내게 고통스러운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 이슬람교는 “나를 위하는 만큼 남을 위하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 가 같은 말이죠.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황금률을 저마다 강조하는 종교 간의 분쟁이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황금률은 특정 종교를 갖지 않아도 지혜 혹은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금률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긴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설교를 전하는 저의 해석이 필요없는 황금률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냥, 그렇게 살라고 하니 그렇게 살면 되는 겁니다.
‘열심히’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ζηλωτής(젤로테스)’인데 ‘불타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정적인 마음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뜨거운 사랑, 열정적인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면 그 사랑은 수명이 다한 것입니다. 계시록 3장 17절에서 라오디게아교회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며 책망을 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2장 4절에서는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열심히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은 열정적인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가고자 힘쓰는 일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핍박당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과 유대교 그리고 내부의 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마음으로 하는 선한 일은 정의로운 일이니 모든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복음을 전한 후, 250여년이 지난 313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핍박받던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시작된 중세시대는 인류사의 어둠의 시대로 기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가고자 힘쓰던 이들이 예수님 없이, 예수님 밖에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는 불의를 행하면서도 ‘정의’라고 포장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 초대교회는 공고화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 토대로부터 흔들려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라”는 베드로의 교훈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가는 정의로운 일을 멈추지 말라는 권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17절 말씀과 연결시켜보면 ‘선’이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대비시키곤 하는데, 종교적으로 ‘악’이란, 무슨 잔인무도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이 악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은 ‘악한 일’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악의 실체’가 분명히 보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싸웁니까? ‘악의 실체’를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에서 떠난 것은 모두 악입니다.
한 예만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길 원하시고, 예배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예배에 관심이 없고, 예배에 참여해도 신령과 진정으로가 아니라 마지못해서 드린다면 ‘선한 양심’에 거스르는 일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면 비방하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십니다. 헐뜯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셔서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받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선한 양심을 자기고 살아갈 때에, 선한 일을 할 때에 뜨거운 마음으로 하십시오.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몰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뜨거운 마음으로 몰입하지 않으면 이루기가 어려운데 하나님의 일은 더욱 더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더 어려운 이유는 성과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성과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기준과 다른 것이 많습니다. 때론, 선한 양심을 갖지 않고 살아가도 당장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차라리 바보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말씀대로 그들 앞에서 잔칫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대충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뜨겁게, 몰입하십시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선한 일을 할 때에는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승리하는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승리는 세상의 성공을 능가하는 멋진 성공일 것입니다. 오늘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에 참여하신 여러분에게 선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길 임마누엘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 기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뜨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하시고, 그렇게 살아갈 때에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세상은 선한 일을 하는 이들을 바보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감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