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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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3주]너희는 썩지 아니할 씨다!

  • 관리자
  • 2020-04-2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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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셋째 주일(4월 26일)
너희는 썩지 아니할 씨다!
베드로전서 1:17~23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위로하심이 오늘 주님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들과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10주 만에 공동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조심해야할 시기라서 이전처럼 모든 교인들이 함께 모이지 못하고, 두 번에 나눠서 예배를 드립니다. 속히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아마도 주일공동예배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도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가능하지 않음은 단지 절망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코로나19’로 인간이 큰 어려움을 당하는 중, 회복되는 창조세계에 대한 소식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아주 오랜만에 해진 후 푸른 하늘에서 어린 시절 보던 만큼 밝은 개밥바라기별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무한질주, 앞만 달려보고 달려왔던 인류문명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믿음과 질병의 문제는 다른 것임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이비 이단의 실체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름과 무늬만 교회고 목사일 뿐 사이비와 다르지 않은 교회와 목사들의 실체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느끼고 본다는 것과 변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면, 거듭나지 않는다면, 과거의 구태의연한 삶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많이 느끼고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항암투병으로 몇 년째 고생을 하고 있는 지인이 있습니다.

한번 항암주사를 맞고 오면 며칠 동안은 먹지도 못하고 거의 반죽음 상태로 지내곤 합니다. 만사가 다 귀찮겠지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또 힘이 생기고,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분이 보름 전,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 씨를 주었습니다. 통통하면, 까서 먹기라도 할 터인데 까먹을 정도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이 말랐습니다.

 

“그냥, 뿌려보세요. 나면 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죠.”
“썩거나 죽지 않았으면 싹이 트겠죠?”

 

기대도 하지 않고 화분에 대충 뿌렸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일(4월 19일) 비가 온 뒤, 월요일 아침 화분을 보니 ‘무슨 씨앗’이 싹을 내고 올라옵니다. 놀랍게도 ‘해바라기 씨앗의 새싹’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쭉정이처럼 말라비틀어졌어도, 썩지 않았으면, 생명을 품고 있으면 반드시 싹을 틔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흙을 만나고, 비와 바람과 햇살을 만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너무 길어져서 우리 안에 남아있는 희망의 빛이 꺼지지 않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희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에덴의 동쪽’, 그 낙원 바깥에서 소외와 자아집착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덴의 동쪽이란’, 창세기에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후 추방된 장소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할 때 ‘에덴의 동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분리와 소외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 결과 인간의 자아는 분리되고, 자기에게만 정신이 팔려 교만하고, 오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앞당겨 근심하며, 끊임없이 집착하며, 이웃의 아픔에 둔감하고, 쉽게 분노하고,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성 프란체스코 같은 위대한 성인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집트의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거나 바벨론의 포로와 같은 삶을 살아가거나 혹은 자신이 이집트와 바벨론의 억압자가 되어 군림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에덴 동쪽에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하고, 그 거듭남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으로 가능합니다.
 


성서일과 병행본문 사도행전 2장 14절과 41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4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난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어떤 상태에서 거듭났습니까?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도망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체념하고 ‘문을 잠그고’ 살아가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거듭나니, 예수님을 잡아 죽인 유대인들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도성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인간 베드로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거듭난다, 새 사람이 된다고 하면, 오리가 백조가 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 새 사람은 외면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임을 기억하십시오. 영적인 바벨론과 이집트를 떠나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듭남이요, 새 사람 된 증거입니다. 단순히 ‘떠남’을 넘어 ‘따름’까지 이어져야 온전한 ‘새 사람’을 이룰 수 있기에 ‘거듭남’을 ‘성화의 삶(santific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듭나려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행 1:38)”고 합니다. 여러분, 회개하고, 성령의 불세례를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는 일은 너무 강력한 일이라 일회성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며 몇 날 며칠 구원받았다며 그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를 생각하십시오. 성화는 과정입니다. 알에서 깨어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에가 되어 고치가 되고, 고치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온전히 겨울을 나고 봄에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적으로 반복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 된 줄 알았는데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더 깊은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불세례요 성령세례이니 내용적으로는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성서일과 시편의 말씀은 116편입니다.

그곳에서는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절망 중에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 영혼을 건지소서 기도합니다(4). 그리고 두 번째로, 기도하면서 서원한 것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지킵니다(18). 깊은 절망 중에 기도할 때에 기도자는 서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서원한 것을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지킵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의 삶입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말씀으로 삼은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전후서는 누가 썼죠? 예, 베드로가 실루아노(실라)의 도움을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기록연대는 기원 후 54~68년경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20년 혹은 35년 뒤에 기록된 서신입니다. 악명 높은 ‘네로 시대(A.D.54~68)’였으며,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쓴 서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신 후, 최소한 20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초대교회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복음의 말씀을 목숨 걸고 전하고 있는 베드로, 그는 당연히 ‘거듭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사람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관한 이야기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울 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행위대로 심판받는다.’는 말씀은 조금 생각해봐야할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의 ‘행위’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의 피로 새롭게 세워진 ‘사랑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의 율법, 행위는 무엇입니까? 22절 말씀에서 세 가지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는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각자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짓 없는 마음으로 형제를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중요한 메시지가 되겠습니다. 과거의 존재방식은 죽고,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사는 것이 곧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요,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행실이요, 이런 사람들만이 거짓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으니라.’는 말씀입니다. 해석이 약간 애매한데 <메시지>에서는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이요, 썩지 않는 것이요, 그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 역시도 영원히 썩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이요, 거듭난 사람들은 진리에 순종하고, 항상 영혼을 깨끗이 하고, 형제 사랑을 쉬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코로나19’로 지난 10주간 가정예배로 드리면서 우리는 ‘한남교회공동체’가 한 가족이요, 모두가 한 형제자매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은 썩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제 씨앗을 잘 심어 가꾸고 풍성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또, 주일예배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일예배를 잘 드려야겠다는 생각 역시도 소중한 씨앗입니다. 이 씨앗도 잘 심어 풍성하게 가꾸시길 바랍니다. 우리 한남교회는 사실 외모로 보면 큰 교회도 아니고, 유명한 교회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상황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며 보여준 모습들은 많은 교회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도 죽은 씨앗이 아니므로, 흙을 만나고 비와 바람과 햇살을 만나 싹을 낸 해바라기 씨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코로나19‘이후, 첫 공동체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너희는 썩지 아니할 씨다!”이렇게 위로하십니다. 이 위로의 말씀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https://youtu.be/x3W32rY4KvY   영상설교는 4월 26일 11시부터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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