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6 부활절 셋째주일
눈뜸의 기적
누가복음 24:13~35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일곱 걸음을 걸은 뒤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하늘과 땅 중에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꽤나 교만한 말처럼 들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위는 ‘나만 존귀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하고도 존귀한 존재이듯, 다른 이들도 존귀한 존재이므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온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라고 고백하며, 저마다 에게 달란트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달란트을 단순히 ‘재능’의 차원이 아니라 ‘은사’의 차원으로 보고, 각기 받은 은사를 통해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일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외형은 닮았을지 모르나 일란성쌍둥이라고 해도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생각이 다릅니다. 같은 부모의 유전자를 받고, 사랑을 받고, 같은 음식을 먹고 자랐어도 생각이 다릅니다. 이것을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하고 관점 혹은 안목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시야를 넓히고 안목을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시야가 넓어지고, 안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기만의 관점과 안목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집니다. 길들여진 관점과 안목은 하나의 렌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나의 렌즈가 도수가 잘 맞는지, 쓰기 전에 이물질이 묻어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적의 현상만 보고 그 기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능력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 어쨌다하기도 하고, 치유의 은사가 일어나는 기도원이라는 소문만 나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물에 빠진 사람의 손을 잡아 끌어내거나 구명줄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지푸라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물에 빠진 사람의 손을 잡아주거나, 구명줄을 던져주거나 혹은 목숨 걸고 구해주려고 물에 뛰어든 사람보다도 지푸라기 몇 줌 들고 흥정하는 사람에게 혹합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고 있는 <신이 된 사람들>을 보면, 자기를 물에서 구해줄 수도 없는 지푸라기를 사려고 모든 것을 다 주고, 결국은 물에 빠져죽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교회도 그 옆에 좌판을 깔고 지푸라기장사를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실이지만, 기적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서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기적 그 자체만 바라보면 예수님의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는 메타포입니다. ‘은유’인 것이지요.
이것을 알지 못하면 문자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고, 문자주의에 빠지게 되면 사실이 아닌 것을 모두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되면 몇몇 문자는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성경의 진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실이면 다 진리고, 사실이 아니면 다 거짓인 것이 아닙니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어머님들이 자식들 밥 먹일 때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엄마는 배부르다.”, 80년대로 넘어오면 “엄마는 짜장면이 싫다”정도가 되겠지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문자로 받아서 어머니가 거짓말을 했으니 ‘엄마는 나쁘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사실은 아니지만, 자식들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실도 있지만, 은유의 언어가 대부분이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지만, 기록한 저자들의 상황과 신앙고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겁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가장 먼저 행하신 기적은 무엇입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요한에게 영감을 주어 이 기적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냥 문자 그대로 잔칫집에는 끝까지 좋은 술이 나와야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물도 포도주로 변하니까 잔치할 때 술 떨어져도 걱정하지 마라 뭐 이런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일까요?
아니죠. 수많은 의미가 이 기적 이야기 속에는 들어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실 복음은 ‘혼인잔치’처럼 ‘즐거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봐야지 ‘술’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을 주당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이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기적과 관련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행하신 기적은 무엇입니까?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입니다. 복음서 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마태, 누가, 마가 모두 장소는 ‘여리고’이며,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시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눈 먼 두 사람이 등장하고, 누가복음에는 한 사람, 마가복음에는 ‘바디매오’라는 이름이 거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모두 뭉뚱그려서 한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복음서마다 다릅니다.
그러면, 사실관계가 다르니 이 기적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이야깁니까? 아닙니다. ‘눈을 떴다’는 육체적인 병 고침 너머에 있는 의미를 본다면, 사실관계는 다를지언정 들려주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은 마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신 기적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예수님은 “무엇이 보이느냐?”묻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데 걸어 다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여러분, ‘눈 먼 자를 고치려면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해라’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까?
눈먼 자들의 눈뜸의 기적은 ‘자신의 시력을 얻는 일’에 관한 말씀이고, 시력을 얻어 예수의 길을 분명하게 보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 눈을 떴을 때는 예수님의 길이 나무 같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다시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니 제대로 그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더욱 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을 하는데 제자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선지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하시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백합니다. 제자들 역시도 예수님을 희미하게 밖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내 분명하게 예수님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먼 자가 눈을 뜬 기적이 품은 상징입니다.
■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을 보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할 때가 눈먼 상태였다면, 믿었을 때 비로소 희미하게 예수님의 길이 보이고, 어느 순간 예수님의 길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눈뜸의 기적’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분명하게 보시는 분들 되길 바랍니다.
■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오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이야기를 하려고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목격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 말을 믿지 못했고, 베드로 역시도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예수님을 만날 숫 없어 시신을 쌌던 베만 놓여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돌아왔습니다. 바로 그날 제자 두 사람이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 며칠 사이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걸어가며 토론에 끼어듭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예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도들도, 시신을 감쌌던 베만 놓여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베드로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눈이 가려져’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고난을 당한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에게 성경에 관해서 풀어주시며,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줍니다. 3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행하신 기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기적이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하신 일은 또 무엇입니까?
여인들에게 부활을 알리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눈을 밝혀주신 일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앞뒤에 ‘눈을 뜨는 기적과 사건’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눈을 떠서 그의 길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요, 분명하게 본 그 길을 따라 사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기까지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길이 흐릿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길을 분명하게 보았고, 그 길이 분명하게 보이자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있던 이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길을 분명하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희미하게 보이던 예수님의 길을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자신의 눈을 뜨는 것이요, 그것이 눈뜸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분명하게 보고 싶다면, 저마다의 렌즈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색깔이 진한 것은 아닌지, 이물질이 묻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도수가 맞지 않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지푸라기를 찾는 신앙에서 벗어나 내민 손이나 구명줄이나 나뭇가지를 잡고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최소한 지푸라기 장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낀 렌즈에 이물질이 묻어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면서, 세상이 말하는 목회자로서의 성공에 눈이 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본다고는 하지만 선명하고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매일 신앙의 성숙을 이루기 위해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목사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과 교인 앞에서 선서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자 나름 힘쓰고 있습니다. 제가 매주 목요일이면 성서일과에 따라 준비한 설교문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고 다른 목회자들과 나누는 이유는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최소한 부끄러운 설교를 하지 않기 위한 검열의 과정입니다.
1995년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이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그분의 길이 조금 선명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조금’이라고 하니까 ‘목사가 되어서 조금이 뭐야?’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의 길은 신비스러워서 조금밖에 볼 수 없고, 사실 ‘조금’도 보지 못하는 설교자들이 득세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예수의 길을 보고, 가고자 하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함께 손잡고 그 길을 걸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신 모든 분들에게 ‘눈뜸의 기적’이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주님, 우리의 흐린 눈을 밝혀주시어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분명하게보고, 그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그 길을 걸어갈 때에 주님이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힘차게 나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