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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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2주] 예수의 삶을 베끼는 사람(음성설교포함)

  • 관리자
  • 2023-04-1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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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부활절 두 번째 주일 / 세월호 9주기
예수의 삶을 베끼는 사람
요한복음 20:19~31(행 2:14,22~32, 벧전 1:3~9, 시편 16편)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깊은 어둠과 풍랑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 세월호 참사 9주년을 맞으며 여전히 피울음을 삼키고 계신 분들, 전쟁으로 인해 깊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압제 속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미얀마 국민들, 난민으로 세상을 떠도는 이들, 기아로 인해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9년의 세월의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고, 책임을 져야할 이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아 유족들은 아직도 피울음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자녀를 푸른 바다에 수장한 부모들의 아우성을 조롱하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항변하던 가인처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지난 해 이태원참사가 일어났고, 이 역시도 진상규명이나 책임자처벌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세월호 참사와 닮은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참사가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온전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선행되어야 하고,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2, 제3의 세월호, 이태원참사,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사건 같은 것들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보듬는 교회


어떤 분은 교회에서 세월호는 말하면서 왜 서해 천안함 피격사건 같은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물론, 천안함 사건도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국가에 의해서 어느 정도 진상규명이 이루어졌고,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국가에서 유공자와 용사로 적절한 조치를 취했고 해마다 국가차원에서 추모식도 거행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유족이나 희생자들에게 ‘자식 팔이니 뭐니’ 손가락질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이태원, 천안함 모두 ‘참사’지만 세월호, 이태원,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에 대해서 교회에서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보듬어야 합니다. 아벨의 피를 머금은 땅이 소리치지 않도록, 돌멩이가 소리치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대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십자가라는 형틀


성경에도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벨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의 주님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다 순교를 당한 이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공포와 두려움으로 내몰았습니다.

로마제국은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조짐이 보이면 가차 없는 폭력을 휘둘렀고, 그 폭력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침 9시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에 돌아가셨지만, 어떤 이들은 십자가 위에서 사나흘씩 고통을 당하다 죽어가기도 했습니다. 십자가는 처형을 당하는 당사자에게도 고통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고통이었고 동시에 로마제국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각인하는 장치기도 했던 것입니다.

 

■ 책망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바라보며 깊은 두려움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가 될 것을 마다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셨으니 그 불똥이 정치적인 야망도 가지고 있었던 자신들에게도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문을 닫고 골방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가운데 서시더니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 바대로 부활하셨음 밝히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고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거듭 “평안하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제자들은 온갖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평안함을 잃어버린 상태로는 주님의 보내심의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평안하라!”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적에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다퉜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뿔뿔이 도망쳤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 대해 책망하지 않으시고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 칭의, 이신득의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신앙적으로 다 되어서, 모범적이라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문제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따르겠다고 결단한 순간부터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단조차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던 것이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은혜인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이므로 주님 안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늘 겸손하게 그분의 길을 살펴 살아가길 힘쓰고,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책망 받을 것이 많고, 흠 많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그 모든 것들을 가리시고 ‘흠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 ‘이신득의’입니다.

 

■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숨을 내 쉬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말씀하십니다.

‘숨’과 ‘성령’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숨을 내 쉬셨다는 것은 죽음을 죽이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다시 한 번 확증하는 것이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은 살리는 영이시니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말씀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죽은 듯 살지 말고,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풍성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왜곡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은 생명이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이들이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무슨 이상한 단발마의 ‘따따따’를 연발하는 것이 성령 받은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죄를 용서하라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하신 후에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용서를 받고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약하면, 죄 사함의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는 누가 사해주는 것입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결국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엄밀하게 살펴보면 ‘죄 사함’에 있었습니다. 그냥 병만 고쳐주셨다면 좋았을 터인데 “죄 사함을 받았다”하시고,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하시니 종교지도자들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일, 하나님의 일을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삶을 복기하라


성령을 받으라 하시고, 죄를 사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죄 용서에 한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을 복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삶을 베끼는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란, ‘예수님의 삶을 복기하여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베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성령 받은 사람’임을 자각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냥저냥 살아가지 마시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런 분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그들의 삶을 도와주시고, 때로는 제자들처럼 두려운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시어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하시며 우리의 삶을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 도마복음서


그런데 이런 말씀을 전하실 때에 제자 중에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드레 후에 도마가 함께 있을 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도마에게 손을 만져보게 하시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던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콥트어로 기록된 그리스도교 계통의 문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기록에는 있지만 찾지 못했던 도마복음서의 실물이 여기에 들어있었고, 1956년에 이집트의 고문서성이 영인본을 공개하면서 신학자들이 도마복음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정경이 확정된 뒤에 발견이 되어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도마복음서는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에 대해 가장 깊은 이해를 한 제자가 도마였음을 밝혀주고 있다고 합니다.

 

■ 의심하는 믿음


의심 많던 제자 도마, 그가 예수님의 길을 가장 정확하게 본 제자였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에 익숙한 한국교회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너무도 표층적입니다.

“정말일까, 당신이 하신 일?”
이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라 신앙의 깊은 정수를 깃는 두레박입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저는 목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주님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런 경험 없이도 목사직을 감당하고 있으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실상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간혹, ‘복을 좀 덜 받아도 만져보고 싶습니다.’할 때가 있습니다.

 

■ 성령의 사람은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인생길에서 때로는 원하지 않는 어두움과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평안하라!”하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화 샬롬을 우리 삶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움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지 마시고 샬롬의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죽이고 부활한 새사람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새사람을 입었으니 우리는 모두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생명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시고, 그런 일을 하는 분들과 연대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내 모습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완벽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신앙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내 모습 이 대로 주 받으옵소서’찬양이 여러분의 삶이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탐구하는 신앙생활을 하셔서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 마시는 기쁨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빕니다.

 

[거둠기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골방에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평안하라”하시며, “성령을 받으라”하신 예수님, 우리 삶에도 찾아오셔서 주님의 평안과 성령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두려움 없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며, 생명 충만한 세상을 가꾸는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분명하게 보고, 따라 살길 원합니다. 안일한 신앙에 머물지 말게 하시고, 매일매일 더 깊은 곳에서 생명수를 긷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일예배실황설교 / 예수의 삶을 베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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