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종려주일] 나는 무엇을 품고 사는가?

  • 관리자
  • 2020-04-05 11:00:00
  • hit3554
  • 222.232.16.100

종려주일(2020년 4월 5일)
나는 무엇을 품고 사는가?
빌립보서 2:5~11


 
https://youtu.be/L7VUoOa8r00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특히 ‘코로나19’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든 분들과 의료진들과 방역 담당자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청명(淸明) – 맑고 밝은 빛이 비추는 절기 

어제는 ‘淸明’이었습니다. 맑을 淸자와 밝을 ‘明’자가 합해진 절기로 ‘맑고 밝은 빛이 비추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24절기 중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는 절기입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청명을 기하여서 본격적으로 봄일을 시작했으므로 이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논둑의 손질을 하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작업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다음 절기 곡우무렵에 심을 못자리판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청명과 곡우 무렵이면 일꾼을 구해서 일을 하거나 품앗이를 통해서 서로 도와가며 부족한 인력을 대체했습니다.
 


맑고 밝은 날을 기대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흐림입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접촉과 소통이 가로막혀있고, 전 세계적인 유행병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갈지 몰라 불안해 합니다. 거기에 텔레그램의 ‘박사방’인지 ‘n방’인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의 관음증, 총선을 앞두고 난무하는 가짜뉴스 등은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성추행과 성폭력을 넘어 성착취, 성노예라는 말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청명처럼 청명하길


저는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무너져 경계가 모호해졌던 논둑이 새로 정비되고, 메말랐던 논에 물을 대고, 딱딱하게 굳어진 땅을 보습으로 갈아엎어 부드럽게 하여, 생명을 살릴 모를 심을 수 있는 반듯한 사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청명이 지나 논둑이 정비되고 논에 물을 가두면, 바람이 잔잔하고 청명한 날에는 논이 유리판 같습니다. 맑은 하늘에 흰구름이라도 있는 날이면, 하늘이 반영되어 논은 멋드러진 풍경화가 되고, 아침이나 저녁에는 붉은 빛으로 물듭니다. 납작한 돌 하나 집어들어 물수제비를 뜨면, 반대편 논두렁까지 작은 돌이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만들며 날아갑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누가 더 많은 물탕을 튀기는가 시합하며 어깨가 뻐근하도록 놀기도 했습니다. 논두렁을 걷다보면 우렁이도 있고, 한 손 가득 우렁이를 잡아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면 우렁된장국을 끓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추억들을 간직하고 살던 시기는 물질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마음은 넉넉했고, 풍요로웠습니다. 마음도 맑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나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물건 취급하고 노예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조롱거리가 되거나 노리개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조롱과 냉소, 혐오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으며, 이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상대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코로나19’는 이런 인간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를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상실하고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아온 결과로 ‘코로나19’가 창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정신없는 목사는 ‘코로나19’를 “우리 아빠가 만드셨어요”라고도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생명’과 연결된 것이지 ‘죽음’과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알려진 서신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당시 유럽 땅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행 16:9)였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과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교회의 최초의 구성원은 자주 옷감 장수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때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렸을 때(행전 16:25~26) 그것을 목격하고 초대교회 교인이 된 간수도 빌립보교회의 초기 구성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냈고,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도 헌금을 보내서 도와 주었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도 헌금(고후 8장)했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편지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염려하지 말라고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경고하고, 그로인해 교회 안에 싹트기 시작한 분열의 문제를 사랑과 겸손한 마음을 품음으로써 해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엇을 품고 있습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바울이 제시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2:5)“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까?
어떤 이는 집문서, 땅문서, 돈지갑을 가슴에 품고 살고, 어떤 이는 학위, 야망, 권력을 향한 욕심, 혹은 세상을 향한 복수심, 어떤 이는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삽니다.


‘품는다’는 것은?


‘품다’라는 헬라어는 ‘φρονειτε(ㅎ프로네이테)’입니다.
이 뜻은 다양한데 ‘느끼다, 생각하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뜻을 같게 하다,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 등입니다. 이 뜻을 말씀에 적용해 보면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느끼십시오, 예수님처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느끼도록 전념을 다하십시오,
예수님의 뜻에 몰두하십시오,
예수님의 뜻에 여러분의 뜻을 맞추십시오.“


즉, ‘그리스도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지정의가 통합된 심리적인 작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라거나 ‘감정적인 생각’을 넘어선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당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지니셨던 생각과 태도, 심성은 간직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그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언젠가는 마음에 품은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났을 때, 우울하고 암울한 것이 아니라, 빛나고 맑은 것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고,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빛’이 거하고 있음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겸손과 높아짐
 


우리가 품어야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주석 성경은 이것을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의 단계


 

본래(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변할 수 없는 고유한 성격)을 지니고 계셨지만,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시거나 자신을 위한 사유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완전히 포기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셨는데 ‘비움’의 헬라어 ‘케노시스 κενωσις’ 는 ‘스스로 자신을 비우셨다.’는 능동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움의 주체가 예수님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신 것은 외부의 어떤 명령이나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들을 비우셨습니까?

 

1) 하나님의 형상을 비우시고 종의 형상을 채우셨습니다.
2) 그리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3)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바울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 방식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런 죽음에 대해 저주(신 21:23)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흉악한 원수나 범법자에게만, 특별히 로마는 정치범을 ‘강도’라고 조롱하면서 십자가형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치명적인 수치의 절정이었습니다. 왜, 이런 최악의 절망적인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을까요? 인류의 죄가 너무나 크고 한없이 절망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처참한 형태의 희생 제물로만 겨우 인류의 죄가 용서될 수 있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승귀의 단계


 

그러나 십자가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영광의 시작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 시점부터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먼저 마태복음 23장 12절의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이 실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최고로 높이 올리셨으며,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 앞에 다 무릎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존귀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이기적인 당파심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높아지기 위한 수단으로 겸손해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겸손해 지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그리고 높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높아지기 위한 수단으로 겸손함을 이용하고자 하면 위선자가 됩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주님의 크심을 온 존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귀히 여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면 자연스럽게 겸손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경외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 교만해 집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연결되지 않으니 그가 가진 지식은 독이 됩니다. 그 독은 이웃을 해치고 자신까지도 사망의 길로 안내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살려면, 사람답게 살려면, 신앙인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느끼고, 그분의 뜻에 몰두해야 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요, 이제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부활의 영광만 바라보지 마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한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는 일상이 이어질 것입니다. 거둠기도 드리겠습니다.

 

[거둠기도]

하나님, 분주하다는 핑계로 우리 자신이 품을 것을 살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빠름의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편한 것만 좋아했고, 깊이 없는 삶을 살아감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품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고 살았습니다.

주님, ‘코로나19’로 세상과 자발적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이 시간에 회개하고 묵상함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더 깊어지게 하옵소서. 이 암울한 시대 속에서 맑고 밝은 희망의 빛으로 우리의 교회가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

*동영상설교는 금요일 링크를 걸겠습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