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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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주]“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 관리자
  • 2020-03-2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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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4주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
시편 23편 1~6 (사무엘상 16:1~13, 엡 5:8~14, 요 9장)


https://youtu.be/SuYbQGpGLkw
 


‘코로나19’라는 어둠의 긴 터널을 보내고 계시는 한남교회 교우여러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힘 내시기 바랍니다.

어느덧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린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런 시간으로 인해 저 밑바닥부터 신앙을 다시 돌아보며 배우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재확산되기 시작한 유럽발 ‘코로나19’는 상상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하여 7500만~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인 흑사병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유럽의 총 인구의 30-60%가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940년 어느날, 프랑스의 식민도시인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가 페스트로 봉쇄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도 떠올라 다시 펼쳐 읽었습니다.
 


‘그 밖에도 몇몇 사람, 그것도 반드시 수위나 가난뱅이가 아닌 사람들이 미셸 씨가 먼저 밟은(죽음) 길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때부터 공포와 더불어 반성이 시작되었다.“

’코로나19‘로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봉쇄되고 있는 상황,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과 공포 속에서의 반성들은 <페스트>에 묘사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은 봉쇄되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탈리아의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시스티나 성당 방문은 저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교황선출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천지창조’를 제 눈으로 꼭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을 완성한 후 스케치북 한켠에 적은 글이 있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87세였는데, 스케치북 한 켠에는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87세의 나이에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라니 쉬운 일이 아니죠.
 


송길원 목사님이 ‘나는 배우고 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내용을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되었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경계부터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마주 앉아 팥빙수를 겁 없이 떠먹던 날이 그립다. 가슴을 끌어안고 우정을 나누던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비로소 나는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나는 배웠다.
마스크를 써 본 뒤에야 지난날의 내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고 침묵을 배웠다. 너무나 쉽게 말했다. 너무 쉽게 비판하고 너무도 쉽게 조언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경박했다.

나는 배웠다.
어떤 기생충보다 무섭고 무서운 기생충은 ‘대충’이라는 것을.
손 씻기도 대충, 사회적 거리 유지도 대충, 생각도 대충…. 대충이 사태를 키우고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제는 나 스스로 면역주치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바이러스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나의 대충, 대충이 공존과 상생(相生)을 파괴하는 길이라는 걸. ...

나는 배웠다.
가장 큰 바이러스는 사스도, 메르스도, 코로나도 아닌 내 마음을 늙고 병들게 하는 절망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그래, 우리는 모두 살아 남아야 한다.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
이제라도 미물이 이렇게 무서운것이라는 것을 배우고...매일 매일의 평범한것 같았던 하루가 모두 기적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도 있지만 그간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사순절4주 성서일과
 


사순절 넷째주 성서일과 구약성경 사무엘상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새의 아들 중에서 두 번째 왕이 될 자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도착하니 장남 엘리압, 아바나답, 삼마 등 일곱 아들을 모두 선보였으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보기에는 장남 엘리압의 외모가 ‘왕으로 삼을 자’로 부족함없이 준수하다 여겼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으로 보느니라(삼상 16:7).”

마침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막내 다윗을 데려오게 하고,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에베소서 5장 8~14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어둠과 빛’에 대해 말합니다. 이제 주님을 믿고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으니 “빛의 자녀들 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의 핵심은 14절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엡5:14)”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은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실로암 연못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맹인은 보지 못하니 어둠 속에 거하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끈질기게 음해하는 바래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성서일과의 공통점
 


성서일과의 공통점을 한 단어로 축약한다면 ‘봄’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니 그제서야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입니다. 맹인을 고쳐주시니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만, 바리새인들은 눈은 뜨고 있으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성서일과는 ‘봄’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봄’은 ‘눈썰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봄이 우리 곁에 왔으며,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봄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봄꽃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피어난 봄꽃을 보는 눈썰미를 가진 이들에게 봄은 보입니다. 함께 숲길을 걸어도 어떤 사람은 나무를 보고, 어떤 사람은 꽃을 보고, 어떤 사람은 곤충이나 동물을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썰미가 좋아도 ‘어둠’이 오면,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빛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시편 23편
 


오늘 본문으로 삼은 시편 23편의 말씀은 ‘다윗의 시’입니다. 성서일과 사무엘상과 짝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움을 받은 날 이후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는 증언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크게 감동시키시니 다윗에게는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그 새로운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 살아지는 줄 알았는데, 목자되시는 여호와께서 인도해 주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눈이 뜨이자 그의 영적인 시야는 한층 넓고 깊어집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그렇습니다.
일상이 평안할 때만 부족함없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다윗이 바라본 것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다윗은 무엇을 바라봅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즐비한 죽음의 그림자와 절망이 보였지만 그의 시선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너머에 있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본 것입니다.

 

다윗의 목도하고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현실을 우리는 ‘코로나19’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어느덧 한 달째 가정예배로 모이고 있습니다. 이 현실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향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위기의 시간을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적인 것은, 이번 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수확은 ‘신천지’라는 사교집단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근본으로부터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발적인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한국사회가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비교종교학자 킴볼 교수는 <종교가 사악해질 때>라는 책에서, 어느 종교든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증상을 보일 때면 사람을 망치는 사악한 괴물로 둔갑할 수 있으니 경계하라고 합니다.
 


1. 자기들의 종교만 절대적인 종교라고 할 때(배타적)
2.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할 때(무조건 아멘) 
3.이상적인 시간’을 정해 놓을 때(휴거, 시한부종말론) 
4.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주장할 때(거짓말)
5.신의 이름으로 聖戰을 선포할 때(예/ 십자군전쟁, IS)

어떻습니까?
신천지만 그렇습니까? 우리 개신교는 이번 사태를 경험하면서 위의 문제들에 대해 심사숙고해야할 것입니다. 특히, 주일성수를 해야한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전염병의 확산지가 되어 교회를 신천지와 동급으로 만든 교회들은 더 반성해야 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십시오.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광야의 시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며 불평하던 이스라엘에게 홍해를 갈랐던 지팡이로 맛사 므리바에서 생명수를 주신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랄 볼 수 있습니까?


우리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야 합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보던 시선과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즉, 반석과도 같은 고정관념을 주님의 지팡이로 내리쳐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입니다. 87세의 미켈란젤로처럼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조용히 묵상할 골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배움의 기회로 삼으시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안위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기도]

주님, 광야와도 같은 시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듯한 이 시간에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시기 감사합니다. 이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이 사건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게 하옵소서. 주님, 이제는 속히 만나 함께 공동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주일마다 누렸던 일상의 소중함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우리 다시 만날 때에는 더욱더 성숙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의 가정마다 위로해주십시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빛으로 오신 성자 예수님의 사랑하심과 빛으로 안내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온 가정과 나라위에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옵나이다. 아멘.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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