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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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2주]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 관리자
  • 2020-03-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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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둘째주일(3월 8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편 121:1~8
(창 12:1~4, 롬 4:1~5, 13~17, 요 3:1~17, 마 17:1~9)

[영상설교는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https://youtu.be/4mngMViQ7w4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여러분, 우리의 출입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안부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처음 겪는 일이라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임을 믿습니다.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어 함께 주님의 전에 모여 예배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시편 121편 1~8절의 말씀으로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리면서 모든 모임이 없으니 교회는 적막강산입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상이 흐트러지면서, ‘별 일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일상이 내일도 당연히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며 오늘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카르페 디엠!입니다.
오늘 혹은 이번 주일 드리는 예배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 아끼지 말고, 오늘의 일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을 붙잡으십시오.

 


‘코로나19의 확산’을 보며 저는 ‘인간의 한계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인공지능시대, 4차과학혁명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지만, ‘신종 바이러스’ 문제 하나도 속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는게 인간입니다. 내일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었음도 깊이 느꼈습니다.
 


우리가 겪는 낯선 상황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두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번 주에 매봉산에 오르며 보니 산수유 꽃망울이 제법 노란 빛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작은 연못에는 맹꽁이도 있고, 개구리알도 있습니다.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든말든 봄은 옵니다.

우리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봄이 오는 것처럼 교우들이 함께 예배하는 날이 곧 올 겁니다. 그날이 당겨지길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한남교회 교우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온 교우가 주일성수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깊이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도해주십시오.

이런 시기는 조용하게 골방에서 삶이 뭐냐, 생명이 뭐냐, 종교가 뭐냐를 깊이 헤아리기 좋은 시간입니다. 저는 이번주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시편 121편의 말씀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경웅의 <시편사색>은 ‘자비로우신 주님(慈愛之主)’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이 노래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이들을 지켜주시는 자비로우신 주님에 대한 노래가 시편 121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가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목회서신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할 교회가 전염병의 근원지가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신천지와 동급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도 덩달아 훼손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에서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주에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강행한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려하던대로 확진환자가 나왔습니다. 예배당은 강제 폐쇄되었고, 교회에서는 ‘지역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라는 사과문을 붙였습니다. 예배당과 교회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나만의 골방’을 만들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싶시오. 그 골방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골방에서 깊은 묵상으로 깨어있는 것도 힘든 시기를 극복해가는 지혜로운 방법일 것입니다.

나만의 골방에서 삶의 문제와, 생명의 문제, 하나님, 종교, 기독교, 교회를 깊이 묵상한다면 이 시간들이 오히려 우리 신앙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일과
 

사순절 둘째주일의 성서일과는 이렇습니다.

구약 성서일과는 창세기 12장 1절~4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고향과 친적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명령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한 아브람에게 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은 시가서는 시편 121편입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며. 눈을 들어 산을 보는 중에 “나의 모든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신앙이 담긴 노래입니다.

서신서는 로마서 4장1절~17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과 복의 근원이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처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문자적인 율법주의에서 떠나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마태복음 17장 1절~9절의 말씀입니다.
잘 아시는으로 ’변화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여기서 살자”고 합니다.

이번 주는 특이하게 요한복음 3장 1절 ~17절의 말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한 것은 3장 16절과 17절의 말씀입니다. 그 가르침 끝에 주어진 요한복음 3장 16절!17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성서일과는 고향처럼 익숙한 곳, 오랫동안 관습처럼 지켜져 오던 율법, ’여기가 좋사오니‘로 상징되는 안주하고자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조차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을 떠나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서일과의 맥락을 생각해보면 시편 121편의 말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로다. 아멘.”


이런 구원의 역사가 이뤄지려면 ’떠남‘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합니까?
우리가 떠나야할 고향과 친적과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낯선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낯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그 예수님의 말씀도 그 당시에는 너무 낯설어 보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 낯선 길은 진리의 길이었으며,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가정예배로 드리는 일은 참으로 낯선 일입니다.

’주일성수‘를 강조하던 한국교회가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낯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예배로 드리는 교회를 향하여 믿음없다고 비판하며, 주일예배를 고수한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시는 바대로 별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 한남교회는 믿음이 없어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 같은, 아픈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정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서 상심이 컸습니다. 시간이 좀 지났으니 말씀드리지만, 지난 23일 오후에는 거의 실신하듯 쓰러졌습니다. 그 이후 저는 모든 모임이 있던 날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낯선 선택이었고, 교회도 재정적으로도 많이 어려워질 것이고, 다시 본래대로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저는 지역사회와 교우들을 위해서 올바른 판단을 한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낯선 시간들 속에서 이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그늘이 되어 주시며,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출입을 지켜주십시오(시편 121). 아멘.”
 

이번 주 성서일과의 주제가 ’떠남‘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입니다. 산은 조용하고 영성을 일깨우는 곳입니다. 성서의 중요한 사건들은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모세의 시내산, 엘리야의 호렙산, 예수님의 산상설교, 변화산 등 모두 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지역의 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숲이 우거진 산이라기 보다는 ’광야‘에 가까운 곳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으니, 언젠가는 그 땅을 높은 산 위에서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산‘이 갖는 상징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시편 121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통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산을 오를 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갑니다. 힘들죠. 그러나 정상에 도달하면 오롯이 산에 오른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신앙의 산을 올라가는 길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그 끝에 어떤 것이 있음을 알기에 ’쥬이상스(jouissance)‘입니다. 라캉이 말하는 쥬이상스는 jouissance -단순한 쾌락적 즐거움(pleasure)이 아니라,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속에 스며 있는 쾌락을 의미합니다. '늪을 기어가는 기쁨'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엔 고난의 골짜기를 걸어가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 그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이라는 확신, 그것으로 우리는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정예배로 드리는 이 시간은 ’쥬이상스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속히 뵙고 싶습니다.
이 낯선 고난의 시간도 곧 지나갈 것입니다.
이 시간이 다 가기 전에 각자의 골방을 만드셔서 신앙과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묵상을 하는 귀한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디딤돌로 삼아 이 나라가 더욱더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가고, 온갖 사이비적인 것들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가길 기도해 주십시오. 다음 주에는 꼭 얼굴을 마주하며 예배하고 싶습니다. 한 주간 내내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출입을 지켜주시길 측원합니다.

 

[거둠기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인간들의 욕심이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해 사이비가 득세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교회가 위로해 주지 못해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디딤돌의 시간으로 삼게 하옵소서. 가정마다 도움이 되셔서. 한 주간 힘차게 살아가게 하시고,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전심으로 회개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이들을 보아서라도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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