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시대에서
창세기 2:15~17, 3:1~7
시편32
로마서 5 :12~19
마태복음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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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nDd80Ezv8U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진정되는 듯하던 우리나라는 ‘신천지’라는 사이비집단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감염이 확산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중에 원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저는 개신교 목사로서 교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몇 목사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듯 행세하면서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생긴 원인을 진단했습니다. 대표적인 주장은 ‘중국이 기독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징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염병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만드신 것이라며, ‘우리 아빠가 만드셨어요’라고 자랑하듯 말하는 목사도 있었습니다. 황당한 주장도 있었는데 국무총리 이름이 ‘세균’이라서 우리 나라에 ‘코로나바이러스19’라는 세균’이 이 나라에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몇몇 목사들의 유치한 해석과 그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교인들의 수준에 절망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신천지같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피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순간에도 4.15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갈까에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신천지가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니 사이비광신집단을 ‘특정종교’라고 비호하고, 종교탄압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광장으로 몰려나옵니다.
‘코로나19’ 확산방지에 협력하기 위해 아픈 마음으로 주일예배를 쉬는 교회를 향해 믿음없다고 비난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온라인계좌로 헌금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예배보다는 헌금에만 관심이 팔려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시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 사순절 첫째주일 성서일과(창2:15~17, 3:1~7, 시 32, 롬 5:12~19, 마 4:1~11)

구약성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을 가꾸게 하시며,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는 내용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암시하는 바대로 뱀의 꼬임에 넘어간 인간이 그것을 먹었습니다. 죄 가운데 빠지게 된것이죠.
시가서 시편은 ‘다윗의 마스길(묵상,교훈)’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허물을 자복하고,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하나님이 자신의 죄악을 사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서신서 로마서는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들어와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해 모든 이들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복음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와는 다르게 사탄을 물리치셨다는 내용입니다.
◾ 창세기, 시편, 로마서의 핵심내용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게 하신 후,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압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형벌은 죽음이 아니라 추방이었다는 것을. 그러면 하나님이 엄포만 놓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을 ‘죽음’이라고 여겼고,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존재를 상실’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가 상실된 상태는 곧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존재물은 존재안에서 존재하고 활동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존재인데, 추방되었다는 것은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거하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만물이 너를 배반하느니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의 실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할 때에는 모든 것과 합일을 이루며 살았지만, 존재를 상실하니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까지 깨어져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성까지 분열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서에서는 죄라고 합니다.
시편의 마스길(묵상, 교훈)에서 다윗은 이러한 인간의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죄를 아뢰니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1절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가리워졌다’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죄가 없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하심 = 칭의’을 통해서 구원받는 다는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언제나 인과응보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죄 사함이 주님의 은혜인 이유는 ‘통회하는 자의 죄를 묻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통회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가 뭔지모르니 괴로운 신음이 멈추지 않습니다. 점차 삶도 시들어갑니다. 회개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등을 돌리고 회개하지 않으니 마음이 점차 곤고해지고 삶도 졸렬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통회를 하니 죄를 묻지 않고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 은혜의 비밀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만 죄의식에 빠지지 않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감격 속에서 언제나 감사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치게 되었다고 증언하는 것이지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이암아’ 선물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에게 차고 넘치도록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죄와 죽음을 세상에 들여왔습니다. 그 이후 인간은 죄의 영향력 아래, 죄가 폭군같이 군림하는 시대를 살았던 것입니다. 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시대를 끊어버리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는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정도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별없이 풍성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
창세기에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복음서에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친 까닭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직후, 예수님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광야란 고독한 곳이요, 자기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탄을 만납니다. 사탄은 마귀의 히브리어로 적수, 대적자, 고소자, 고발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구약은 악마, 원수라고 표현했고, 신약에서는 ‘디아볼로스’라고 하여 ‘사이로 던지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뭔가를 던져서 그 관계를 훼손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하는 것이지요. 에덴동산의 뱀은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들어와서 하나님께는 사람을 송사하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비방하게 하여 이간질 시켰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사람의 약한 의지와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을 충동하고 유발하여 하나님과 이간질시키고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어떤 형체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그 무엇’입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매순간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광야 40일 동안 세 번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시험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십자가 위에서도 그 시험은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인간의 약한 면을 공략하여 자신의 악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수간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40일 주야로 금식을 하신 예수님이 ‘주리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철저하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첫번째 시험은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먹기 위해서 삽니까?
요즘 이 세상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떡은 방법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에 마귀는 예수님에게 ‘이 정도의 기적은 너도 행할 수 있지 않으냐?’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떡이지만,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한 떡이 필요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없이 육체의 떡만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영혼의 양식은 없어도 좋으니 육체를 위한 떡을 달라고 합니다. 육체를 위한 떡만 채워진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폭군처럼 지배하는 시대의 현실입니다.
두번째 시험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요, 그런 기적을 본 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니 앞으로의 공생애가 평탄하지 않겠냐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영웅주의적인 허영심을 부추기는 유혹입니다. 오늘날 신천지사이비집단의 이만희는 물론이려니와 소위 전통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스스로 영웅이 되어 허영심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코로나19’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읽지 못하고, 허튼 소리를 해대고 있는 것입니다. ‘주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스스로 영웅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누리는 자는 시험에 빠진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번째 시험은 자신을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세 가지 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입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리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이익을 준다고 해도 기꺼이 자발적으로 마귀를 경배하며, 그것을 삶의 지혜라고 말하는 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험은 어느 정도 세상의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 것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가난한 교회 목사라고 큰 교회를 이루고 싶지 않겠습니까? 큰 교회 목사들처럼 살고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싶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극심한 가난과 싸워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자 힘쓰는데 교인들은 늘지도 않고, 몇몇 교인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 길을 가지 않을수는 없고, 세상에서는 알아주지도 않고, 심지어는 대리운전이나 폐지를 주워 팔거나 농사를 지어가며 목회를 해야만 하는 목사에게 세 번째 시험이 주어진다면 예수님처럼 선뜻 ‘사탄아 물러가라! 어떤 타협도 없다!’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2월 20일 <기도하는 남자>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답니다.
가난한 교회의 목사와 사모가 수술비 5천만 원을 구하기 위해 고뇌하며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위의 세 가지 시험을 이겨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은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왜 사탄은 나에게 이런 조건을 걸고 유혹하지 않는가?”하는 이도 있으며, 자기 스스로 시험에 든 자도 있습니다. 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지켜갈 수 있습니까?
저는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32절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리라.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하리라(시편 32:5,6).”말씀에서 그 실마리를 찾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려면 광야와 같은 기도의 골방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골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이후 인간의 죄의 영향력 아래, 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선물을 거저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물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정도로 풍성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엄중한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죄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시대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