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9일 사순절 넷째주일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에베소서 5:8~14
■ 어둠이 깊은 시대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고, 봄은 완연하지만 이 땅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좀처럼 물러갈 생각이 없는 듯 우리 곁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저는 3월 들어 봄을 타듯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밝고 명랑하게 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제가 우울했던 까닭은 3.1절 축사에서 정부가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도 없고, 강제징용을 한 적도 없다고 우겨대는 일본의 전범기업에 대해 면죄부를 준 일, 세종시 어느 아파트에서 일장기를 달아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 목사라는 사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나는 신이다>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들과 여전히 그들을 신봉하는 신도들, 성소수자들을 위한 활동을 하다 죽은 교단 목사의 추모제장소를 불허한 한신 대학교 대학원의 처사와 원장을 겁박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목사들과 장로들을 보면서 이 땅의 어둠이 참으로 깊다는 생각에 우울했습니다.
■ 오도된 확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마다 자기 확신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오도된 확신’ 혹은 ‘오도된 믿음’은 그래서 무섭습니다. 자기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모두 적으로 규정해 버리고, 제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종교의 탈을 쓰게 되면 십자군 전쟁 같이 잔인한 일들도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입니다.
■ 사순절 4주 성서정과
오늘 성서일과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축하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를 내쫓고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요?”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들이 눈이 먼 사람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꾸짖습니다. 본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들, 오도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둠이 깊어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시편 23편에 등장하는 ‘죽음의 그늘 골짜기’가 상징하는 바는 ‘어둠’이요, 어둠은 곧 죽음을 상징합니다.
사무엘상의 말씀(16장)은 하나님께서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중에서 풍채가 좋고 준수한 엘리압이 나오자 “저 사람이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구나”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고 하십니다.
■ 그루터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시대는 겉은 화려한데 속은 초라합니다.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회 풍토가 속내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사람이야 어떻든지 간에 일류대학 간판으로 포장만 하면 다 됩니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겉모습을 꾸미기에 열중하고, 그러는 사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해졌습니다.
종교도 여기에 편승해서 우리 사회를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로 내모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이단사이비가 활개를 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너무 어두우니까 끝난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빛이신 하나님의 역사도 막을 내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은 늘 그루터기 신앙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입니다.
■ 어둠과 빛의 상징
어둠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반하여 빛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진리이신 이유는 생명의 영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살리는 영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고 할 때 정확한 의미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방언을 받았다는 차원보다 훨씬 깊은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의 현장은 생명현상이 발생하는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이 세상의 어떤 문제들이 생명을 죽이는 어둠의 행태인지를 바로보고, 어둠에 맞서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 영생이란?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아갈 때에는 어둠의 종,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의 끝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의 끝은 사망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불로장생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영원한 진리요, 빛의 열매이므로 이 땅이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이어지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생입니다.
■ 잠자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빛의 자녀로 세워주셨습니다. ‘빛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임에 유의하십시오. 빛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나무인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열매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빛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몽사몽, 잠자는 이들이 있나봅니다. 그래서 전에 어둠에 속해 있을 때에 하던 일을 습관처럼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에베소서에서는 ‘잠자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이들을 많이 봅니다.
제가 이 봄에 우울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교단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둠의 일을 하고 있으니 우울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양반 행세들을 합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불똥이라도 튈까 싶은 것이겠지요. 아주 작은 촛불이 하나 더해지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황동규의 ‘불 빛 한 점’
1938년생 황동규 시인의 <오늘 하루만이라도>라는 시집에 ‘불빛 한 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80대 중반 이후의 자신의 삶이 마치 안개에 갇혀 출항하지 못하는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선장이 포구에 배를 정박하고는 어둠보다는 낫겠다 싶어 흐릿한 불을 켜놓고 내립니다. 포구에는 그만그만한 배들이 묶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는 이어집니다. “어느 배에선가 나도! 하고 불이 하나 켜진다. 반갑다./끄지 마시라.”
시인의 심정이 어떤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 겁니다. 조금만 배 선장실에 켜져 있는 흐릿한 불빛, 어둠보다는 나으려니 싶어 겨놓은 외로운 불빛, 그것이 하나 둘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포구의 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빛의 자녀지만, 어쩌면 포구의 작은 배의 선장실에 켜있는, 어둠보다는 낫겠거니 켜져 있는 흐릿한 불빛에 불과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불빛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큰 숲은 태우는 것이 작은 불꽃에서 시작되듯, 어둠을 살라먹는 빛도 작은 불빛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 엔토 슈사쿠의 <침묵>
작은 빛에 대해 묵상을 하면서 엔토 슈샤쿠의 <침묵>을 떠올렸습니다. 침묵은 1600년 초기부터 50년간 일본에서 자행된 그리스도교박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40~60만 명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배교의 증거로 ‘나미아미타불’을 외치거나 예수나 마리아의 초상이 그려진 종이를 밟으면 살려주었습니다. 고문은 오물통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에 피가 쏠리면 금방 죽으니까 귀 뒤에 상처를 내서 피가 나오게 하여 서서히 죽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종이는 자구 찢어지니까 동판에 예수의 얼굴을 새겨놓고 밟게 했는데 이것이 후미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밟았는지 후미에 동판에 발자국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코와 눈 같은 곳이 닳아 움푹 패여 있는 것입니다. 엔토 슈사쿠는 후미에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첫째, 후미에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둘째, 후미에를 밟았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셋째. 내가 그 입장이었으면 밟았을까, 고문을 받아 죽었을까? 이것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후미에가 멀고 추상적이라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모님이나 자식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밟아라, 밟을 때까지 고문을 하고, 끝내 밟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후미에에 새겨진 당사자라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부모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밟아라!”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밟아라!” 그래서, 후미에를 밟고 살아난 이들은 비겁자들일까요? 소설에 그들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도 ‘침묵’입니다.
목사인 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어땠을 것 같습니까?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20대 청년 때였다면 당시에 많이 불렀던 ‘무릎 끓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라는 노랫말처럼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고문받기 전에 후미에를 밟을 것 같습니다. 실망하셨나요? 그런데 여러분의 2/3도 저와 같지 않은가요? 강한 신념을 관철시키기보다 밟았을 가능성이 훨씬 크고, 더군다나 고문도 싫고, 가족까지 죽임당하는 것은 더더욱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겁쟁이요, 기껏해야 저 포구에 매여 있는 작은 배의 선실에 켜있는 흐릿한 불빛에 불과합니다.
■ 내 안에 빛이 있는가?
그러나 이게 끝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저 같은 겁쟁이요 나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목숨까지도 버리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나약한 겁쟁이들이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세상에서 따돌림 당하던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던 이들이, 풍채나 외모도 볼품이 없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빛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희미하고 흐릿해도 좋습니다. ‘네 안에 빛이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작은 소리로라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너는 빛이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여러분, 주님은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주님이 내게 지금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심지어는 “밟으라!”고 하시는 그 음성에 조차도 기꺼이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밟으라고 하셨을까요? 생명, 생명을 주시는 것이 주님이 하시고자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둠, 죽음의 세력, 사이비는 절대로 자신을 밟으라고 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죽음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십시오. 겁쟁이라도, 작고 희미한 불빛이라도 좋습니다. 그 작은 불빛을 통해 성령의 불, 생명의 불을 밝히시는 하나님께서 생명기운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시는 따스한 봄날 되길 빕니다. 아멘.
우리 안에 거하시는 빛이신 주님,
빛이신 주님을 모시고도 잠자듯 살아가는 우리를 꾸짖어 주십시오.
희미한 불빛이라고 작은 불빛이라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작은 불꽃들이 모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믿고, 내 안의 빛을 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