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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병이어는 무엇인가?

  • 관리자
  • 2020-02-23 18: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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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병이어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6:1~15


그릇에 뭔가를 담으려면 비워야 합니다.
뭔가 가득 담긴 그릇에는 다른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빈약한 이 그릇을 님은 또 비우고 비우시며, 언제나 신선한 생명으로 채우고 또 채우십니다.’

 

‘비움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새삼 묵상하게 하는 시입니다.

내 안에 생명을 채우려면, 내 안에 쓰레기 같은 욕망과 교만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담아둔 채로 생명을 채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인의 노래에 등장하는 님은 ‘하나님’입니다. 이 시를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쓰레기 같은 것들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비우라고 하실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쳐서 비우게 하십니다. 그렇게 비우게 하시는 이유는 새로운 생명을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감히 신선한 생명을 담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비우시고 또 신선한 생명으로 채우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채우심으로 빈약했던 그릇을 생명을 담은 귀한 그릇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30년 만에 진가를 알아본 팬들에 의해 소환된 가수 양준일 씨가 최근에 화보집 겸 자신의 철학을 담은 <메이비>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나는 늘 쓰레기를 버린다.
머릿속에 남은 쓰레기도 치운다.
비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나간 과거가 나를 쫓아와 괴롭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로운 희망과 꿈이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저의 음악적인 취향과는 달라서 팬이 될 가능성은 없었지만, 양준일 씨의 삶과 그의 철학은 저를 팬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시인의 심오한 시와 양준일 씨의 고백은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더 나아가 내가 비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강제로라도 비우신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소개해 드린 시는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의 ‘기탄잘리(Gitanjali)’에 나오는 첫 번째 시입니다. ‘기탄잘리’ 50번째 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마을 강을 따라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황금마차를 타고 온 왕이 홀연히 내게 손을 내밀고,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는가?
아, 거지에게 구걸의 손을 내밀다니, 이 얼마나 왕다운 농담입니까?
이윽고 나는 바랑에서 아주 작은 옥수수 알갱이 하나를 바칩니다.
하루해가 지날 무렵 바랑을 쏟아보니 아주 작은 황금 알갱이가 하나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비통해 하면서 나의 ‘전부’를 바치려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고 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는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으면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여 감사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구한 것을 주셨는데도 감사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묻습니다.

‘죽음을 앞둔 병자를 살려내면 기적이라 하면서도, 왜 병원에도 가지 않고 건강한 것에 대해서는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걸인처럼 손을 내밀고 하나님께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느냐?” 여러분,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드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을 드리고자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황금 알갱이가 아니라, 바랑 속에 있던 작은 옥수수 알갱이 같은 것입니다.

 

■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4장)과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5장)도 보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내쫓으시며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행태를 고발하시고 자신들을 대변해 주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분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십니다.

이때 빌립은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백 데나리온이 있어도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배달의 민족’을 통해서 오천 명이 먹을 음식을 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디베랴의 갈릴리 건너편, 그 시골마을에서 갑자기 오천 명을 먹일 음식을 마련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오천 명도 성인 남자만 센 것이니 더 많습니다. 사람의 합리적인 지식의 한계란 이런 것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안드레의 생각에 이것으로 오천 명을 먹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잔디에 앉게 하시고, 떡과 물고기를 들어 축사하시고 앉은 자들에게 원하는 만큼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모두 배불리 먹은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이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아직도 그들이 깨닫지 못한 진리, 즉 그분이 영생을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알려 주시는 의도로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들려주시고, 행하셨음에도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몰라보는 이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표적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리던 정치적인 메시야인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홀로 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 오병이어 기적의 재해석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 한 가족의 몫을 내어 놓는 것에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가족의 봉헌이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한 아이의 도시락이 비워지자 오천 명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채워진 것입니다. 타고르가 ‘빈약한 이 그릇을 님은 또 비우고 비우시며, 언제나 신선한 생명으로 채우고 또 채우십니다.’라고 노래했듯이, 그렇게 채워진 것입니다. 바랑 속의 작은 콩 하나가 드려지자 황금 알갱이가 된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내 몫을 기꺼이 교회와 세상을 위해 내 놓고 있는가? 나의 시간과 노력, 나의 재능을 교회 안팎에서 활용하고 봉사하고 있는가?’

 

오늘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계속돼야만 합니다. 물질·황금만능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신체적·영적 비만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나눔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허파가 되어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듯, 자신의 오병이어를 기꺼이 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적 허기와 갈증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이 ‘비움’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내 안에 있는 쓰레기를 비울 때에도 그 자리에 새로운 희망과 꿈이 들어갈 공간이 생기는데, 하물며 나의 ‘오병이어’를 비운다면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차마 비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 자기의 오병이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하시는 방식은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르의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십시오.

 

‘빈약한 이 그릇을 님은 또 비우고 비우시며, 언제나 신선한 생명으로 채우고 또 채우십니다.’

 

그릇을 비우는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비우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고 넘치도록 신선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이요, 채워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비워주시는 것도 은혜지만, 더 큰 은혜는 스스로 비우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숙한 신앙인은 스스로 비워 ‘텅 빈 충만’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의 오병이어는 무엇입니까?

작아도 좋습니다. 작은 옥수수 알갱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을 예수님 손에 들려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축사하시면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혼자 먹고자 움켜쥔다면, 오천 개가 되는 보리떡과 오천 마리의 물고기를 다 먹어도 배고플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사는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전 세계 인류가 모두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풍요로운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이는 7초에 한 명씩 죽어가고 있으며, 지구촌 기아인구는 10억 2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비만으로 인해 사망하는 이들도 7초에 한 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와 더불어 살 길이 있는데, 우리는 나누지 못함으로 너와 함께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오병이어를 나누십시오. 비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여러분의 삶을 채워주시고, 오병이어가 나눠진 그곳도 생명의 떡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거둠 기도]

주님, 공허한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을 비우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오병이어도 나눔으로 비우게 하옵소서. 우리의 비워진 마음에 새로운 희망과 꿈과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모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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