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5주 성서일과 /이사야 58:1~9, 시편 112:1~9, 고린도전서 2:1~12, 마태복음 5:13~20
신앙은 현재형
마태복음 5:13~20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MATTHEW 5:13,14).”
are는 ‘be’동사의 현재형으로 “you”, “we” 그리고 “they”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영문법 기초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동사의 시제입니다. 동사의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로 분류되고 ‘~ing’가 붙으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영어성경은 어떤 번역본이든 공통적으로 be동사 ‘are’을 사용함으로, 신앙인의 현존에 대해서 ‘과거형 빛이었다, 혹은 미래형 빛이 되어라!’도 아니고, 변화될 것을 의미하는 ‘진행형’의 의미도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즉, 신앙은 현재형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과거에 신앙이 좋았어라 거나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좋은 신앙인이 될 거야’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빛이고 소금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교회력 본문(성서일과)
주현절 5주의 성서일과는 ‘이사야 58:1~9, 시편 112:1~9, 고린도전서 2:1~12, 마태복음 5:13~20’입니다. 복음서의 내용을 제외한 성서일과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금식을 하면서도 논쟁하며 다투며 주먹다짐하는 인간군상의 현실을 고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지 않고 괴롭게 하십니까?’ 항변합니다. 요즘의 말로 바꿔 말하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지 않고 괴롭게 하십니까?’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는 ‘너희가 하는 금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다. 오늘 날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너희가 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니다.’라고 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요, 유리하는 빈민을 집으로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지를 외면하지 않는 것(6,7)‘이라고 밝힙니다. 이 말씀은 오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이며, 이렇게 한 후에 하나님을 부르면 응답하실 것이고, 부르짖을 때에 대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말씀은 참된 금식을 하는 자들이 받을 복에 관한 말씀이요,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참된 금식은 ’말과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인간의 한계에 부닥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그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소금과 빛‘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상징적인 단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금과 빛이 주는 상징성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이 되어야 한다‘도 아니고 더더욱 ’소금이었다, 빛이었다‘도 아닙니다. 선언적인 의미를 담아서 ’빛이다,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신 후 율법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 보면, 내용의 흐름이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너희는 빛이요 소금이다‘라는 것과 율법의 완성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싶은 것이지요. 19~20절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 율법의 수호자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그랬습니다. ’바리새‘라는 뜻은 ’분리하다‘라는 뜻으로, ;구별되다, 거룩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지만, 그들은 나름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던 이들이었습니다.
∎ 우리의 ‘멜라카(Melacha)’는?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두루뭉술한 율법을 구체화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도 세세하게 세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지켰던 안식일 법은 지금도 유대교가 지키고 있는 안식일법 39가지 범주 ‘멜라카(Melacha)’에서 가늠해 볼 수 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런 것입니다.
1. 조레아(Zoreah) - 씨뿌리기/씨앗 심기, 씨뿌리기, 물주기가 금지된다. 만약 안식일이 시작된 후 누군가가 자른 꽃들을 가져오면, 물이 없는 꽃병에 그냥 꽂아둔다. 그렇게 나뒀다가 안식일이 끝난 후에 물을 부어준다.
3. 코짜이르(Kotzair) - 추수하기(자르기) /땅에서 나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가지나 잎 하나도 뽑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
6. 조레흐(Zoreh) - 까부르기/타작한 후 쭉정이를 바람에 날려서 알곡을 고르는 행위가 금지된다.
29. 메샤르테이트(Mesharteit) - 선긋기, 표시하기/안식일에는 음식을 제외하고는 피부, 손톱, 양가죽, 종이, 나무 등에 선을 긋거나 표시하는 것이 금지된다. 글씨를 똑바로 쓰기 위해서 편지지에 선을 긋는 것도 금지된다.
32. 코타이브(Kotaiv) - 알파벳 두 자 이상쓰기
33. 모차이크(Mochaik) - 알파벳 두 자 이상 지우기
36. 메차베흐(Mechabeh) - 불끄기
37. 마아비르(Ma'avir) - 불 지피기
39. 호짜아흐(Hotza'ah) - 운반하기/ 공공영역의 한 장소에서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다.
이런 세세한 규칙들은 안식일 법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일반인들은 어떤 법인지 조차 알 수 없었으니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이 “너 율법을 어겼어!”하면 그냥 그런 줄 알아야 했고, 세세한 율법을 알지 못하니 늘 죄의식에 빠져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율법을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가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율법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멜라카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정녕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소금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3대 요소는 물과 먹을거리, 그리고 소금입니다. 유목민들은 동물의 젖과 핏속의 소금기로 이를 해결했고, 정착민들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 갯벌에서 조개나 연체동물, 해초류 등을 채취해 소금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다양한 효능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음식물에 녹아 맛을 내고, 소금에 간이 된 음식은 부패를 더디게도 합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장아찌’나 ‘젓갈류’도 소금을 넣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기능은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음식의 간을 맞출 때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알맞게’들어가야 합니다. 부족해도 안 되고, 넘쳐도 안 됩니다.
소금의 쓰임새를 통해서 우리는 수많은 상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맛’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맛나지 않는 것 같은 이 세상을 맛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저런 문제로 ‘지옥 같은’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인이 그곳에 있음으로 ‘천국’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세상은 ‘다 끝났어!’라고 절망해도, 그리스도인이 있음으로 ‘아니, 희망이 있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맛깔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자기만 내세워도 안 됩니다. 겸손하게 녹아져서 없는 듯, 그러나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은밀한 중에’하는 것입니다.
∎ 빛
빛과 대조되는 것은 어둠입니다. 어둠은 이 세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어둠이 가장 짙을 때는 빛이 떠오르기 직전입니다. 미명의 새벽, 한 줄기 빛이 비춰오면서 만물은 생기를 얻고 자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시간을 ‘매직 아워’라고 합니다. 사진가들이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해뜨기 직전 10분 정도, 해진 후 10분 정도 ‘매직 아워’가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빛은 찬란하지만, 다른 것을 드러나게 합니다. 다른 것을 드러나게 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것입니다.
사진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습니다만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정의가 있습니다. 필름카메라의 경우, 필름이 장착된 카메라 내부는 암흑입니다. 거기에 적당량의 빛을 넣어줍니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많은 빛을, 어떤 때는 천천히 조리개를 통해서 빛을 넣어줍니다. 그러면 같은 대상도 전혀 다르게 표현됩니다. 이렇게 빛은 자신을 통해서 ‘다른 것’을 드러나게 합니다.
빛을 통해서 얻는 단상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는 빛이다!” 는 말씀은 “이웃을 드러나게 하는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살아가면서도 종종 실패하는 이유는, 이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려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빛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웃의 빛으로 인해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빛내고자 하면, 마치 태양아래서 필름을 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사진을 찍었어도 빛이 들어간 필름으로는 아무것도 현상할 수 없게 됩니다.
∎ 신앙은 현재형
언제 우리는 빛이고 소금입니까?
‘지금 여기서’ 빛이고 소금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빛이요, 소금입니다. 한남교회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에서,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빛과 소금입니다. 빛이든 소금이든 과하면,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과하면 독선이 되고, 자신뿐 아니라 이웃도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금식하면서 논쟁하고 주먹다짐을 하던 사람들,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한 사람들, 말로만 혹은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서 먼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살맛나지 않는 세상과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맛나게 하고, 어둠에 비추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요, 유리하는 빈민을 집으로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지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사야 58:6,7)’입니다. 그래야, 종교적인 허례허식에 빠져 살아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을 것이요,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현재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서’ 소금이고 빛입니다. 그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