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종교개혁기념주일
로마서 8:26-30, 히브리서 7:24-25
오늘은 종교개혁 501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마지막 날 밤, 마르틴 루터가 구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지난해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대대적인 ‘종교개혁’과 관련된 행사들이 열렸지만, 지난해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면 ‘개혁’이 아니라 ‘퇴보’와 ‘변질’의 길을 걸어온 듯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 예배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는 오랜 종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의 역사에서 겪은 수많은 일이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조차도 종교적인 영성과 상징으로 자리하면서 신앙을 형성해왔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 신학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종교개혁의 바탕에 선 개신교는 지난 1500년 동안 형성해왔던 좋은 종교적인 전통들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이나 정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1500년 이상 형성된 종교적인 예식을 간직해 왔지만, 개신교는 소중한 종교적인 전통들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전통적인 종교예식이 주는 영적인 울림과 경건성의 상실은 개신교 예배에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사도운동에 기반을 둔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전통적인 예배의 형식’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린 격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예배가 가벼워졌고, 말씀도 신학적인 고민이나 신앙적인 깊이가 없는 감성만 자극하는 설교가 판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의 즐기는 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멘!”을 강요하는 설교가 판을 치고, 교인들은 습관적으로 “아멘!”하고, 심지어는 예배가 코미디가 되어버렸습니다. 신 나게 박장대소하며 스트레스를 풀고는 “은혜 받았다!”고 착각하고 돌아갑니다.
개신교인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가톨릭 신자는 점점 늘어납니다. 십여 년 전부터 신앙의 경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예배드리는 가톨릭 교인이 되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개신교가 너무 가볍고 깊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일부 대형교회와 보수교회 목사들의 일탈행위는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지게 했기에, 많은 이들이 개신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 성당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 예배공동체의 회복
한남교회 예배는 대다수의 개신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형식과 비교하면 상당히 전통적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예배를 대하는 자세가 곧 신앙의 척도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당연히 예배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요소가 있는데,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심으로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하게 하십니다. 어떤 예배에서는 성가대의 찬양으로, 어떤 예배에서는 대표기도로, 어떤 예배에서는 말씀으로, 어떤 예배에서는 찬양으로, 어떤 예배에서는 예배하는 예배자의 모습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예배의 모든 요소는 다 중요합니다. 이렇게 한 순서마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가운데 은혜가 충만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귀한 공동체가 됩니다. 하늘의 뜻을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는 다리가 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회복은 곧 우리 신앙의 회복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예배를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로만 국한하지 않지만, 모든 예배의 중심은 교회에서 드리는 주일예배라고 믿기에 저의 일주일은 ‘주일 예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서 다른 예배를 잘 드린다는 것도 사실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주일예배는 중요합니다. 지금 이 시간 예배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서시길 바랍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여러분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공동체의 회복이야말로, 종교개혁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예배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부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일은 곧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기도는 뻔뻔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막무가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질 때까지 떼쓰기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런 의미입니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길 바라면서 제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일이 뒤틀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았고, 그냥 내 생각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신다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데 양심상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잘 나갈 때에는 기도하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하더니 문제가 생기니까 이제야 도와달라고 기도하니?’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미안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곧 알게 되었습니다. 양심이니 뭐니 따지지 말고 지금 당장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는 것을. 어떤 분이 교회에 왜 나오지 않으시냐고 하시니까, 한 번 두 번 빠지다 보니 면목이 없어서 못 나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것은 면목이 없어도 됩니다. 면목이 없어야 다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너무 늦은 것은 없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낀 그 순간이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입니다.
■ 예수님의 기도
기도에 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누구를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살아갈 때에도 우리를 떠나는 일 없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의 말씀은 이를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하여서 기도하지 못할 때에는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우리보다도 우리를 위하여 더 열심히 기도하시는 예수님, 말로 다할 수 없어서 탄식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기도로 우리는 주님을 떠나 살아가는 순간에도,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입니다. 이 예수님으로 위로받으시길 바랍니다.
■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 돌아올 때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할 때, 이전 자신의 신앙생활과 다르다고 해서 낯설어하지 마십시오. 미안하다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입니다.
종교개혁, 참으로 거창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은 ‘나의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개혁되면 종교개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개혁이 되었어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천지가 개벽한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목사로부터 교인으로부터 칭송받는 신앙생활을 한들, 내 삶의 변화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가길 원하고, 어떻게 변화되길 원합니까? 그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우리가 그를 떠나있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결단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듯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삶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어떤 분은 ‘나는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도 삶의 변화가 눈곱만큼도 없으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변화에 이르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종교개혁은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가 되어 더는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현실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가십니다. 그 한 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