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친구로 살기(창조절 10주)
창세기 12:1-4/ 요한복음 15:12-15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친구 따라 교회 가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 친구 중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시거나 방황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와 예배하도록 인도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친구에 관한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죽마고우 -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비밀이 없는 친구
수어지교 – 물과 고기처럼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친구
금석지교 -단단한 무쇠나 돌처럼 견고함을 지닌 사이
막역지교 - 서로의 의기가 모여 편안한 친교
관포지교 - 허물이 없는 친교를 나누는 친구
간담상조 - 간과 쓸개를 내놓을 정도로 서로 마음을 터놓음
이런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니, 이 기준에 따르면 저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미 성공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
성경 인물 중에서 하나님의 벗으로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인데, 성경과 외경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역대하 20 :7 – 주님의 벗 아브라함(히브리왕 여호사밧이 에돔과 전쟁할 때)
이사야 41:8 –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 바벨론 유배 시절
야고보서 2:23 – 그(아브라함)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다니엘 (제2경전/외경) 3:35] -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벗이라 불러주시고, 친구로 삼아주신 이유는 그가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몸에서 난 상속자를 약속하였음에도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 사라가 이삭을 낳자 무책임하게도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어 쫓습니다. 그랄 땅으로 내려갔을 때에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큰 위험에 처할 뻔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에도 자식을 지켜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로 삼아주신 이유는, 마치 친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과도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든 고향과 친척 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도,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에도 한 번쯤 의심하고 갈등할만한데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벗이라 부르시게 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이 험한 시대에 그렇게 살아가도 될까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는 손해 볼 것이 뻔할 것 같은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재고, 우리의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실 때에 항상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벗이라 불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친구는 기능이 아니라 관계
친구는 기능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친구가 무엇을 해주니까, 친구를 만나면 유익하니까 등의 기능적인 것만으로는 친밀한 친구관계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기능적인 친구 맺기를 하면 얼마든지 표면적으로는 친한 척할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친구는, 자신에게 유익한 경우에 한없이 친합니다. 간이라도 다 빼어줄 듯 행동하지만, 조금만 손해 보는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친구관계를 청산합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능적인 친구는 친구라 할 수 없습니다. 친구끼리는 도움도 주지만, 때론 갈등하고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리고 관계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어도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어떤 때는 수다도 떨지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뭐 특별한 이야기 없이 시간을 보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고, 만났다가 금방 헤어져도 그것 때문에 삐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만남을 기억해 보십시오. 당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방법은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다가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근처에 있는 돌을 모아 제단을 쌓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곳으로 찾아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웅장한 사원과 탑들을 쌓고 그곳에서 신을 만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돌무더기를 쌓아둔 그곳으로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정이요, 이것이 관계입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능으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좀 부족하고, 단점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이어진 관계임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능적으로 부르신다면, 대다수 사람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의 보혈로 맺어진 관계성 때문입니다.
■ 전제조건
복음서 요한복음 15장 12-15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대화 일부입니다. 유언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면서, ‘그것을 행하면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하면’이라는 전제조건입니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아주 중요한 전제조건을 생략하고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겠다”는 말씀은 무척 좋아하면서, ‘행하면’이라는 말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씀은 좋아하면서 ‘주 안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단서는 잊어버립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에도 제1계명이 시작되기 전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무심하게 넘어갑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것이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나하나의 계명을 살피면, 십계명이야말로 구속하는 법이 아니라 해방을 가져오는 법이요, 자유의 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제조건을 잘 새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이 행위(삶)의 일치를 이루며 살아갈 때 기꺼이 ‘벗’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에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니라 15절 하반절의 말씀에 나와 있는 바대로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역시도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제아무리 열심히 헌신해도 헛될 뿐입니다.
진실한 주님의 친구가 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나는 하나님의 친구요.”라고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에도 “나는 예수님의 친구!”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실패하는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권면의 말씀 드립니다. 청소년기, 그 아름다운 시기에 예수님을 친구로 삼아 ‘자기 정체성’을 확실하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 친구는 언제나 친구 편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기꺼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신 분들이십니다. 그러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적’입니다. 친구는 항상 자기편이지만, 적은 항상 남의 편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당시 고대 근동의 신들은 ‘공포의 신, 두려움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신 제사를 드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칼로 긋고, 자식들을 불에 집어넣고, 산 채로 사람들을 매장하는 일들을 통해서 그 공포심을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휴거니 지구의 종말이니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우리를 겁박하는 사이비들이 있습니다. 기도차지 않는 이야기로 현혹하는데, 마음에 공포심이 들어오면 사리분별능력이 떨어져서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단 사이비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들은 지속해서 공포심을 조장하고, 그곳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지경으로 정신을 피폐화시키기 때문에 가족이고 친구고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런 공포의 신이 아니라 친구와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친구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제단이 높지 않아도, 신전이 아니어도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시는 하나님, 그냥 나그네처럼 아브라함의 집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당시의 종교가 믿던 신과 하나님은 전혀 차원이 다른 분이셨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친구는, 언제나 친구 편입니다. 여러분을 기꺼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친구로 살아가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일상으로 스스럼없이 찾아오시어 언제나 여러분의 편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면 적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에도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어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
그러나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잠언 27장 6절에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때론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친구관계가 유지되려면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는 요한복음 15장 14절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친구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하여 책망하십니다. 그렇다고 공포심을 조장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장 부드러운 방법으로, 이해할 방법으로, 관계를 지속해서 이어가는 방법으로 책망하신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친구관계를 맺고 유지하시고자 하실까요? 요한복음 15장 16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렇습니다.
우리를 먼저 택하셨으니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모릅니다. “내 삶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삶이야!” 이런 당당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삶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처럼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택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의 응답입니다. 기꺼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시어 친구 되신 주님께서 주시는 한 없는 은혜의 삶을 경험하시는 모든 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