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대림절 셋째 주일)
스바냐 3:14-20, 이사야 12:2-6.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8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에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 둘째 주일에는 ‘섬기러 오신 예수님’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섬기는 신 일색의 세상에 섬기는 신으로 오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런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력에서 대림절 셋째 주일에 우리에게 제시하는 말씀은 스바냐 3:14-20, 이사야 12:2-6,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8절의 말씀입니다. 네 가지 본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듯하지만, 결국 ‘그날’을 갈망하고 있으며,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관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 겨울 숲과 묵나물
겨울이 깊습니다. 숲의 나무들이 앙상한 덕에 여느 계절에는 보지 못했던 숲의 속내를 먼발치에서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텅 빈 겨울 숲과 겨울나무’를 보면서 ‘비움’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겨울 숲이 내밀한 숲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나를 비운다는 것은 내 안에 감추어둔 것들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안에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도, 저 겨울 숲처럼 볼만하다면, 쓸쓸해 보여도 추하지 않다면 제대로 나를 비운 것이겠지요. 내 안에 감추어진 것이 추하지 않다면 봄이 오면 다시 초록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숲처럼 생명을 품을 수 있겠지요. 내 안에 품은 것들이 생명을 피울 수 있는 것인지 돌아봤습니다. 볼품없이 보여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도 내 안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면 새롭게 창조되는 그 무엇을 나는 품고 있는가 돌아보았습니다.
홍천에 있는 친척 집에 김장김치를 얻으러 간 길에, 잘 말린 호박고지를 얻어오면서 고사리, 곤드레, 시래기 같은 묵나물을 생각했습니다. 제철 나물들을 쪄서 말린 것을 묵나물이라고 하는데 필요할 때에 물에 불리거나 삶으면 좋은 식재료가 됩니다. 죽은듯하고, 볼품없지만, 신기한 것은 오히려 영양적인 면에서는 그냥 나물로 먹는 것보다 훨씬 몸에 좋다고 합니다. 죽은 듯, 모든 것이 다 끝난 듯하고 거칠게 다루면 부서져 버리는 묵나물이 물을 만나면 다시 살아나 제 안에 품고 있는 향기와 맛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떠올렸습니다.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묵나물이 물을 만나 부풀어 오르는 과정이 ‘물세례’에 해당한다면, 그 과정을 마치고 요리하는 분의 손을 만나 맛난 음식이 되는 과정은 ‘성령으로 주는 불세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상 끝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18년 대한민국의 상황이 바짝 마른 묵나물과도 같은 상황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겨울 숲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쓰러진 나무도 있으며, 묵나물도 물에 담가놓으면 아무리 깨끗하게 손질하여 말린 것이라도 불순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봄이 오면 쓰러진 나무는 썩어서 토양에 기력을 주고, 묵나물에 붙어있었던 불순물을 잘 제거하면 맛난 반찬이 됩니다. 이 과정을 저는 ‘회개’로 보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겨울 숲이 주는 신록의 숲과 묵나물이 주는 신비스러운 맛, 그것을 ‘기쁨’으로 보았습니다. 너무 수필적인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제가 이런 묵상을 하도록 이끈 교회력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 기뻐하며 부를 노래(스바냐 3:14~20)
스바냐 예언자는 7세기말 예레미야 예언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므낫세 통치 시대의 패악했던 종교 혼합주의를 책망하며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키게 했던 예언자입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므로, 모든 나라는 다가올 ‘그날’에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절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남겨두셨고, 그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을 높이시고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기쁨을 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상은 온통 어둠과도 같고, 불의가 만연한 것 같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남겨두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시겠다는 것이 오늘 읽은 스바냐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2018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하나님을 떠나 살며 온갖 불의를 저지르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지만, 바알과 말감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루터기, 남은 자’들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의로 인해 반드시 징벌의 날은 오겠지만, 입술이 깨끗한 자(9), 하나님께 구하는 백성(10)을 남겨주셔서 남은 자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한남교회와 이곳에 계신 분들은 바로 그 ‘남은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이 기뻐하며 부를 노래는 무엇입니까?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원수를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이스라엘에 닥쳐오는 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노래의 내용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는 ‘너희 안에 계시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하나님께 구하는 백성,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구원 때문에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이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개인구원에 침착하고 있지만, 성서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구원은 ‘공동체적인 구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내용은 연관 본문인 이사야서를 보시면 더 분명해집니다.
■ 이를 온 땅이 알게 할지어다(이사야 12:2-6)
오늘 읽은 이사야서는 첫 번째 이사야의 예언으로 분류되는 기원전 736년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으로 분류됩니다. 이사야 시대에 유다를 위협하던 앗수르 제국의 멸망과 마침내 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왕국이 세워짐을 대조하고 있는 내용으로 결국, 온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온 땅이 알게 할지어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평화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인 구원이며, 개인의 번영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번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자이시고, 힘이시고, 노래이시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들을 온 땅에 알도록 전하고 크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뢰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갖 세상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갈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해괴망측한 사설이 마치 그리스도교의 진리인 양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시오, 힘이시며, 노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확신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사야서는 이 기쁨에 대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고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이제 복음서의 본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물’이라고 하는 단어가 이사야서에서 복음서로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누가복음 3:7~18)
앞에서 묵나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묵나물을 물에 담가두면 바삭 말랐던 나물이 물을 먹고 본래의 형태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그냥 둔다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을 제거하고, 각종 양념을 하거나 다양한 요리법을 통해서, 요리사의 손을 통해서 묵나물은 새롭게 거듭납니다. 하나의 은유로 말씀드린 것입니다만, 저는 이런 과정을 ‘회개’라는 과정과 연결지어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회개를 촉구하면서 오실 그분의 길을 예비할 때의 시대적인 상황은 어떻습니까?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것도 억울한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팔아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스바냐 예언자가 이사야 예언자가 위태로운 조국의 현실에서 예언하던 상황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여전히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맘몬을 숭배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요 3:7)”고 일갈합니다. ‘회개(μετανόια,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의 뉘우침이나 후회 같은 감정이 아닙니다. 회개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 실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회개는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까지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던 이기적인 신앙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일입니다. 게다가 회개는 구원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회개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고, 참된 회개를 통해서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요한은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요구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 부과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마라. 완력을 이용해서 강탈하지 마라….” 이런 결심이 섰거든 내가 물로 주는 세례를 받아라. 그러나 오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의미하는 바가 많지 않습니까? 요한이 요구하는 것들은 개인적인 감정의 회개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의 회개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물세례’입니다. 물에 불려진 묵나물이 새롭게 변신하는 것이 요리사의 손에 달린 것처럼 이제 오실 그분의 ‘성령과 불 세례’를 통해서 회심한 사람들, 소명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변화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장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서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복된 말씀입니다.
■ 소명을 발견한 사람들의 삶(빌립보서 4:4~7)
회개는 죄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기독교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과는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녁을 벗어난 삶, 거기에서 돌이키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면, 회개의 다른 말은 ‘소명을 발견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삶은 곧 ‘구원받은 삶’이기도 하고, ‘그루터기’의 삶이기도 하며,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에 대해서 오늘 교회력 본문으로 제시된 빌립보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염려하지 말라, 모든 일은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라(빌 4:4-6)”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말씀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은 ‘모든 사람’, 공동체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 관용, 기도와 간구 등은 모두 한 개인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입니다. 오늘날 그릇된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적인 가치들을 개인적인 단어로 바꿔놓았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개인의 일대 일의 관계를 포함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과 신앙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루터기’가 없어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있음에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전반적으로 불의하고 타락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또한 하나님은 또한 남겨두신 당신의 백성, 그루터기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그루터기,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떤 어둠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깊은 어둠의 시대라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그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며, 소명을 깨닫고, 소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기쁨으로,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맡겨진 소명을 감당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