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3:16-21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2018년 대림절을 보내면서 첫주에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둘째 주에는 ‘끊임없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공포의 신과 대조되는 분으로서 섬김을 위해 오신 예수님’, 셋째 주에는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령 세례는 개인구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늘 담대하게 살아가며, 기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오신 주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에게 오시는 주님께서 큰 은총을 가득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늘은 신약성서의 중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새 새명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태어남, 거듭남, 중생 born again’이라는 신약성서의 중심적인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 중생에 대한 고전적인 본문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가장 극명하게 담은 이야기는 오늘 읽은 본문 앞에 있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요 3:1-10)’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신약성경 전체의 중심적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요3:1-2a)”. 여기서 ‘밤’이라는 것은 ‘어둠’과 관련이 있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은 요한복음에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빛나는 빛이시며, 모든 사람을 깨우치는 참된 빛이시시며,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어둠 속에 거하던 니고데모는 빛이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아직 그 빛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거듭남’이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누구나 ‘육에서 태어나지만’ 우리는 또한 ‘영으로 태어나야 하는데’ 이것은 새롭게 위로부터 태어나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이 새로운 삶은 곧 하나님의 성령을 중심으로 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즉, 니고데모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며,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면 내면의 변화, 개인적인 삶의 변화는 필연적이며 이것이 ‘거듭남, 중생(born again)’이라는 것입니다.
■ 중생 = 다시 태어남
이 중생의 개념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데 ‘죽고 살아남’과 ‘다시 태어남 = 중생’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무로 치면 뿌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과거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정체성에 대해서 죽는 것과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던 나를 죽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거듭남이요, 중생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거듭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1세기에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를 따라 죽음의 길을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9장 23절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 앞에 ‘날마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이 죽음이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 다시 태어남’이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걷는 것이요, 그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예수’인 것입니다. 과거의 존재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죽지 않고서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곧 중생이요, 거듭남이요 삶의 변화입니다. 이런 중생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습니다.”는 말씀은 거듭난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방식과 새로운 정체성,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 독생자를 주신 이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0).” 여기서 ‘그’는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진리를 따르면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18, 21). 그래서 예수님은 ‘길’입니다. 앞에서 드린 말씀과 연결지어보면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요, 빛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한 문장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듭남, 중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거듭나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상징되는 ‘죽음’을 그것도 ‘날마다’ 지고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십자가’는 ‘길’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날마다 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길은 ‘죽고 살아나는 길’이며,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의미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만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지, 예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알거나 이해하거나 예수에 관한 특정 교리를 아는 것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존재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즉, 과거의 존재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사는 것,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어제의 삶을 버리고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 자신을 돌이켜 다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래서 ‘날마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분명해졌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 왜 우리에겐 거듭남이 필요할까?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아의식’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자아의식은 점점 강화되는데, 자아의식이 생길 때 당연히 생겨나는 것이 ‘자기관심(self-concern)’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중심적인 자아’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속해있는 세상의 가치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형성되는데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기에게만 관심을 기울여, 눈이 어두워지고, 자신의 삶에만 파묻히며,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고,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존재 방식’인 것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에덴의 동쪽’, 그 낙원 바깥에서 소외와 자아집착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덴의 동쪽이란’, 창세기에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후 추방된 장소로,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분리와 소외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 결과 인간의 자아는 분리되고, 자기에게만 정신이 팔려 교만하고, 오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앞당겨 근심하며, 끊임없이 집착하며, 이웃의 아픔에 둔감하고, 쉽게 분노하고,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성 프란체스코 같은 위대한 성인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집트의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거나 바벨론의 포로와 같은 삶을 살아가거나 혹은 자신이 이집트와 바벨론의 억압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거듭남이 필요하고, 그 거듭남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불 세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 성령과 불 세례를 받은 사람, 그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요, 거듭난 사람입니다.
■ 독생자는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은 당시 요한복음의 저자가 치열하게 싸웠던 영지주의자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대해 ‘저주받은 곳’이요, ‘떠나야 할 곳’이라고 했는데, 요한은 ‘아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어!’라고 단호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비록 어둠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 세상을 사랑하시며, 궁극적으로 창조하신 뜻대로 선한 세상을 만들어가실 것이라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둠의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주시지 않았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으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듭남, 중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거듭남은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듭난 사람,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날마다 성화(sanctification)라 불리는 계속적인 변화의 과정을 ‘날마다’ 이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살아가고, 그 결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방황하던 탕자가 집에 돌아와 환영을 받는 삶, 귀신에 사로잡혔다가 고침을 받아 제정신을 회복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삶, 고개 들지 못하고 살아가던 여인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삶,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삶,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이가 눈뜨는 삶, 절름발이 곰배팔이의 다리와 손이 힘을 얻고, 귀머거리의 귀가 풀리고, 벙어리의 혀가 풀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새 삶이요, 거듭남이요, 중생이요, 새 생명을 얻은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맞이하심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성탄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