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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라(누가복음 13:18-21)

  • 관리자
  • 2018-10-28 18: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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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라
누가복음 13:18-21

 

 

 

오늘은 ‘사자성어’를 하나 소개해 드리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에 장승요라는 유명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림실력이 아주 뛰어나서 당대의 화가로 이름을 날립니다. 안락사라는 절의 주지로부터 용을 주제로 한 벽화를 그려달라고 해서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공개했는데, 모든 사람이 감탄할 만큼 훌륭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주지 스님이 용의 그림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왜, 용의 눈은 그리지 않았습니까?” 묻습니다. 그러자 장승요는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날아오르게 돼서 안 넣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해 주었더니 너무 거만해졌다고 합니다. 이에 장승요는 “용이 날아가도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하면서 용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넣습니다. 그러자 벽화의 용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락사 절 벽화에는 눈동자가 없는 두 마리의 용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찍어 넣는 것처럼, 이미 그만두어도 완벽한 것 같지만, 점 하나만 더하면 최고의 걸작이 완성된다는 의미로 ‘화룡점정’이라는 사자성어가 사용되었습니다.

 

■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조금 과장된 이야기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작은 것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99도에서 1도가 올라가면 물이 끓어오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고자 길을 나서는 목자가 등장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라고 밝히셨습니다. 100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 한 마리로 인해 그 완전함은 상실됩니다. 100에 비하면 1은 작은 것이지만, 1의 회복 없이 ‘하나님 나라의 완전성’을 담보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1을 회복해야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온전히 이뤄지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1에 해당하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과 소외당한 이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 종이 한 장 차이

 

 

1은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것이 더해짐으로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1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산을 오르다 갈림길 앞에 서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결국, 정상을 향해서 가지만, 어떤 길로 한 걸음을 내딛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길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며 산을 오릅니다. 다시 이어지는 갈림길이야 각자의 길마다 묘미가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갈림길에서의 첫걸음은 영영 다른 목적지로 우리를 안내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선택, 그것이 한 사람의 삶과 운명을 뒤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선택이라도 중요한 이유는 그 선택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선택하며 살아가고, 그것이 우리 삶을 이룬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 선택은 너무 미미해서 ‘종이 한 장 차이’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공한 인생과 실패한 인생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천재와 바보의 차이도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극복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 한 장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그리고 그 한 장을 넘기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리 수많은 땀 흘림과 노력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때론 그렇게 노력을 했어도 극복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 한 장의 차이는 마치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다가옵니다. 물론, 그 작은 차이를 소홀히 여기면 영원히 나비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번데기에게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주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를 번데기의 우화에서 봅니다.

 

■ 바다거북이 이야기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이가 다시 성체가 되어 깨어난 곳으로 오는 확률이 몇 %인지 아십니까? 0.1%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0.1%가 거북이라는 종을 지금까지 이어오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바다 거북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미가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가고 2개월이 지나면, 알들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때 새끼거북이는 알 속에서 자기의 생존 무기를 만드는데 그 무기는 ‘카벙클(carbuncle)’이라는 임시치아입니다. 새끼들은 카벙클로 알의 내벽을 깨고 나옵니다. 그때쯤이면 임시치아가 다 부러지고 잇몸에서는 피가 납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하는 것은 어미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덮어놓고 간 30㎝가 넘는 두께의 다져진 모래입니다. 알을 누가 훔쳐가지 못하게 어미가 단단하게 다져놓았기 때문에 최소한 3일에서 7일 정도가 걸려서 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고 바다로 향할 때, 갈매기와 독수리가 그들을 공격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도착하지만, 큰 물고기들의 밥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 물고기를 피해 심해의 바다에서 홀로 1년을 지낸다고 합니다. 이것을 ‘실종의 시간’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20년이 되어야 짝짓기를 하고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 거북이가 될 확률이 천 마리 중의 한 마리, 0.1%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0.1%로 인해 거북이는 지금도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으니, 0.1%의 작은 확률이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사실 씨앗 중에서 겨자씨가 가장 작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렇게 작은 관엽식물인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 정도로 크게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이렇게 겨자씨처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으면 부풀어 올라 커지고, 단단했던 밀가루가 부드러워져서 빵이 되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의미는 아주 분명합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앞과 뒤에 있는 사건을 살펴보면 앞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자를 고쳐주시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권고하면서 ‘나중 된 자 중에서 먼저 될 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꼬부라진 여자나, 나중 된 자는 모두 그 당시에 ‘작은 자’들이었으며, 없어도 그만인 존재, 아니, 차리리 없으면 더 좋을 존재로 여겨지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고, 이런 작은 자를 소중히 여겨야만 하나님 나라를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믿음이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새 생명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거짓입니다. 지난주에는 영어단어 하나를 제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믿음을 영어로 ‘belief’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be+lief’가 더해진 것인데, ‘lief’는 ‘life’, ‘삶’이라는 단어의 ‘f’와 ‘e’의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이 뒤바뀐 것, 즉 삶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이 변화되지 않고, 뒤바뀌지 않으면 그냥 ‘belife’인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멍청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적으로 멍청이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처럼 급격하게 올 수도 있지만, 겨자씨나 누룩처럼 아주 작은 것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품어야 할 ‘겨자씨’나 ‘누룩’은 무엇일까요?

 

■ 우리가 품어야 할 겨자씨와 누룩

 

 

다양한 것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여러분이 품어야 할 작은 겨자씨와 누룩 같은 것으로 ‘주일 성수’를 추천합니다. 주일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고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주일날 드리는 한 시간의 예배는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예배를 드리신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임해 보십시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십시오.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작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작은 부분이 겨자씨가 되고 누룩이 되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를 위해서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온전한 예배가 또 다른 한 사람을 온전한 예배로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모이고 모여 거룩한 예배공동체가 됩니다. 거룩한 예배공동체를 이루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예배에 참석한 모든 이들과 그 공동체에 복을 내려주십니다.

 

한남교회가 이런 복을 누리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계명 중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산을 움직일 수 있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는 겨자씨와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이 되려면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면 우리는 자라날 수 없습니다.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멈추어있음이 아니라 쇠퇴하고 변질하여간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불가능이라는 단어 ‘impossible’이 있습니다. 여기에 작은 점만 더하면 ‘I’m possible’이 됩니다. 불가능과 가능의 차이는 큰 차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점 하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결론

 

 

사자성어 ‘화룡점정’이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점 하나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 점 하나로 인해 용이 승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점 하나의 차이로, 어떤 용 그림은 벽에 그대로 남아있고, 어떤 용 그림은 진짜 용이 되어 승천합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도 분명합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라.’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품어야 할 작은 겨자씨와 누룩으로 ‘예배’를 제시했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김으로 우리는 큰 변화를 이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남교회가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뜻 안에서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큰 부흥을 이뤄갈 것입니다. 한 사람은 99를 온전하게 하는 1이요, 거북이라는 종을 지속시키는 0.1%입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사람이다!” 이런 결단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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