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주님의 숲을 이루는 사람들(고린도전서 11:23~27, 12:12~13)

  • 관리자
  • 2018-10-14 18:52:00
  • hit1651
  • 222.232.16.100

주님의 숲을 이루는 사람들
고린도전서 11:23~27, 12:12~13

 

 

오늘은 세계성만찬주일(World Communion Sundy)입니다. 성만찬은 세례와 함께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예식입니다. 둘을 합해서 성례적, 거룩한 예전이라고 합니다. 이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 됨(고전 12:13)을 추구하는 매우 의미 있는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2년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모임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한 전 세계 교회들이 10월 첫 번째 주일을 성만찬 주일로 지키기로 하고 성만찬 예식서도 출간하였습니다. 그런 의미를 담아 오늘 한남교회도 세계 교회의 일원임을 확인하고자 세계성만찬주일을 지키며 성만찬식을 거행할 것입니다.

 

 

■ 숲의 비밀

 

 

‘숲’을 생각하면 ‘큰 나무’를 생각하지만, 숲에는 큰 나무만 있지 않습니다. 숲에는 잘 생긴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못 생긴 나무도 있고, 재목이 될만한 나무도 있고, 아무리 자라도 재목이 될 수 없는 나무도 있습니다. 인공림도 있지만,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에는 나무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식물이 숲의 일원이 되어 살아갑니다. 숲 가장자리로는 국수나무 같은 덤불 식물이나 찔레나무 같은 가시덩굴 식물이 얼키설키 자라서 숲의 안과 밖을 경계 지어줍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작은 초록 생명이 분주하게 꽃을 피웁니다. 나무에 이파리가 자라 숲의 낮은 곳까지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니까 숲 아래에 사는 작은 식물들은 서둘러 꽃을 피우고, 나무도 그들이 열매를 맺은 후, 그늘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 자랄 즈음인 5월 초순이 되어서야 나뭇잎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간혹 문제가 생깁니다.

칡넝쿨 같은 것인데 그들이 퍼지는 것을 방치하면 숲은 곧 황폐화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칡의 묘지’라고도 말하는데, 칡이 다른 식물들을 완전히 뒤엎어서 완전히 고사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비밀정원의 호박 덩굴을 전형안 장로님과 함께 제거했는데 아직 서리도 내리기 전인데 서둘러 제거한 이유는 호박 덩굴과 넓은 잎이 비밀정원의 언덕을 점령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제거하다 보니 임정기 장로님께서 심어놓으신 돼지감자가 호박 덩굴 때문에 짓눌려서 제대로 자라질 못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숲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양한 식생이 다양하게 있어야 건강한 숲이 됩니다. 어느 한 종이 독점하거나 득세하는 숲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혼자서 살려고 하면 모두 죽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죽습니다.

 

■ 숲의 비밀의 주는 교훈

 

 

저는 ‘숲의 비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근본주의에 근거한 보수교회와 깊이 없는 신학에 근거한 문자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칡넝쿨 같아서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용납하질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같은 개신교도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모태가 되는 가톨릭조차도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죄라고 규정한 것들에 대해 각종 혐오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은 규합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교회는 다양성이 무너졌습니다. 이 교회나 저 교회나 다를 것이 없고, 교단이 달라도 특색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틈을 타서 온갖 이단 사설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으면 오히려 자부심이라고 있을 터인데, 무지와 독선 때문에 생긴 결과이기에 부끄럽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오로지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은 ‘네 편이냐, 내 편이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숲의 다양성이 지속 가능한 건강한 숲을 만들어갈 수 있듯이, 서로의 차이와 다른 점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한국교회도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몸은 하나

 

 

사도 바울은 이런저런 이유로 분열되어 갈등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몸’에 관한 예화를 들면서 권고합니다. 당신들이 지금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인 등 혈연과 지연에 연연하며 자기들의 입장만 옳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순간부터 혈연이나 지연을 떠나 한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손과 발과 눈과 귀와 모든 것들의 기능이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이 불편하면 온몸이 함께 아픕니다. 몸 일부가 훼손되어도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여러 가지 제약이 따릅니다. 물론, 몸을 이루는 신체기관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장이 멈추면 몸은 ‘죽음’에 이릅니다. 다른 기관이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뇌사상태’에 빠지면 우리의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장이나 뇌만 있으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없어서 불편한 것도 있고, 없으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만,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 중 필요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몸을 건강하게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편식하면 안 되겠죠? 자기에게 맞는 운동을 적당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편식하지 않고 운동만 잘하면 건강할 수 있을까요? 환경도 뒷받침해줘야겠죠? 편식은 하지 않은데, 온갖 농약으로 범벅된 음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면, 열심히 달리기하는데 미세먼지가 가득한 곳을 뛰어다닌다면 많은 문제가 생기겠죠? 동시에 아무리 좋은 음식재료와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편식하고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환경과 개인의 신앙적인 결단, 이것이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 두 가지의 잘못된 만남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해도 교회 자체가 문제인 경우도 있고,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면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 새 언약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한 지체’라는 것을 확증하고 ‘하나가 되라!’고 권고하면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나눈 식탁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단순히 식사로 그친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라는 상징이 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식탁을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때론, 보리 떡과 생선을 통해서 이루어진 기적의 식탁도 대했고, 배가 고파 안식일에 밭을 지나가다가 이삭을 훑어 먹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이들을 통해서 풍성한 식탁을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나누었던 떡과 포도주가 있는 식탁은 대체로 그들이 매일 접하던 평범한 식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것은 아주 특별한 식탁이 되었고, 예수님은 그 식탁을 통해서 ‘새 언약’을 주시며, 주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개역성경에서 ‘기념’으로 번역된 단어는 ‘기억하라’는 의미가 더 적합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가 차려진 식탁은 일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으로부터 새 언약을 받은 제자들은 이런 일상의 식탁을 대할 때마다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죽으심’ 곧 ‘주님의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을 받은 제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시는 것이므로 십자가를 본받아 새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예식’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겪으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행위임과 동시에 ‘새 언약’을 받은 제자들처럼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 언약’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으로 전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바로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 주님의 숲을 이루는 사람들

 

 

새 언약으로 하나된 이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숲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숲들이 모여 ‘주님의 숲’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이야기’라는 CCM 가수가 부른 ‘주님의 숲’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한남교회 와서 처음으로 부서별 찬양대회를 할 때 ‘디모데회와 유니게회’ 회원들이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저는 힘들 때면 숲으로 갑니다. 숲길을 마냥 걷다 보면 마음이 치유됩니다. 그런데 그 숲 중에서 ‘주님의 숲’이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주님의 숲 안에 거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숲에서 지친 우리를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 상상만 해도 평안해집니다. 그 ‘주님의 숲’은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숲에 가서 고기나 구워먹고 오지 말고,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와 꽃과 곤충과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보고 느끼고 온다면 숲은 우리에게 진정한 힐링을 줄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서 나오고, 다른 이들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냥 좋은 숲에 가서 고기나 구워먹고,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고 오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숲은 신비롭습니다. 주님의 숲은 더 신비롭습니다. 우린 오늘 세계교회와 함께 성만찬주일을 지킴으로 ‘주님의 숲’에 거하는 일원임을 확증합니다. ‘주님의 숲’ 찬양을 부르면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주님의 숲을 이루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