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공허하십니까?”
요한복음 15:1-11
삶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는 듯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무기력감으로 하루하루를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견디며 살아가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삶은 견디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만,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 같은 현실’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다가 ‘다람쥐 쳇바퀴’ 돌릴 힘도 없어지면 인생은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삶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 신앙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하는 것이 지난주 저의 묵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 덕분에 얻은 생명, 주님이 풍성하게 해주시는 생명이라면 ‘공허함’과는 거리가 먼 삶일 터인데 많은 분이 ‘살아있으되 죽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어떤 분들은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데도 ‘공허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픈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중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살았으되 죽은 것 같은 삶’이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살아있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는 끊임없는 세상의 유혹과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미치지 못한 우리의 신앙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것을 딛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세상일이 되지 않을 때 ‘공허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고,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도서의 말씀은 인생은 허무하니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것 외에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전 5:)’입니다.
■ 매일 스치는 사람들
이 복음성가는 그렉 넬슨과 필 맥휴라는 CCM 음악가가 만든 곡입니다. 이 노래와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이들은 오전 내내 스튜디오에서 곡을 만들고자 씨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중년의 여성 웨이터가 그들에게 와서 웃으며 주문을 받는데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 여성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그녀의 얼굴표정에는 그늘이 서려 있었습니다. 두 친구는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이구동성으로 “저 여자에겐 주가 필요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식당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표정에서도 공허함이 느껴졌고, 그들 역시도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점심을 먹고 스튜디오에 돌아온 그들은 식당에서 느낀 감응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작사를 하고 작곡을 했고, 그것이 ‘매일 스치는 사람들’이라는 유명한 복음성가가 된 것입니다.
이 찬양을 함께 불러보실까요? (부른 후) / 이 찬양의 영어 가사를 그대로 옮기면 이런 내용입니다.
매일 그들을 나를 스쳐 지나갑니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걱정이 가득한 공허한 얼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발걸음, 그들만이 아는 아픔을 안고 두려움에 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마다 예수님만이 들으시는 소리 없는 통곡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웃음으로 가리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입니다. 모든 꿈이 깨어지고,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 주님이 문이 되시므로 그들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 주님 안에서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습니까? 성령의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지만, 때론 온갖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짊어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지요. 그러면서도 ‘난 아무렇지도 않다’며 가식적인 웃음으로 우리를 포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늘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주님 밖으로’ 꼬여냅니다. 마치, 그것이 ‘주님 안에서’인 것처럼 가장하고 다가옵니다. 신앙 좋다는 분들이 이단에 빠지고 삼단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복음의 비밀’이 ‘축복의 비밀’로 왜곡되어 전해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도 교인도 ‘구도자’가 아니라 ‘득도자’가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안다 하고, 교인은 교인대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결국, 설교자도 교인도 ‘주님 안에서’ 바로 서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릴 때에도, 예배 드린 후에 세상으로 돌아갈 때에도 공허한 마음을 안고 돌아갑니다. 이러한 공허함이 반복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개인은 신앙을 잃어버리고, 교회는 쪼그라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입니다.
한남교회라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설교자인 저는 저대로,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주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늘, 여러분에게 질문하십시오.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한 일인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 안에서’ 옳은 일인가? 이것이 우리의 기준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할 수 있고, 비로소 모든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예수님을 채우는 만큼 여러분은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 나는 포도나무요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이에 관한 아주 적절한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내게 붙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주 안에서’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맺은 열매가 아닌 것은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서 제거해 버리실 것이라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안에서 맺혀진 열매는 참된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주님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요, 그렇게 할 때에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시니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웃는 척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이 없으면 공허한 눈빛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삶은 저절로 빛나게 되는 것이며, 내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우리의 내면에서 빛나는 주님을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이들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최상품의 열매입니다.
주님 밖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마른 가지처럼 버려져 불에 던져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 강조하고 계십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 이 역시도 ‘주님 안에’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기쁨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쁨 충만한 삶에 공허함이 자리할 곳은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 거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공허함에서 벗어나 참된 기쁨을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다.
■ 너희는 가지라
그러면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가 되어 ‘주님 안에’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10절에서 이 방법을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의 계명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장 8절에 ‘최고의 법’이라고 하면서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말씀이며, 예수님께서도 거듭 강조하신 황금률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네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네 이웃’이 누구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아직도 주님 밖에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밖에서 살아감으로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시시때때로 주님 안에서 살지 못하는 우리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지난주에는 우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보수기독교단체이며, 에스더기도운동본부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확신으로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고, 그를 통해서 온갖 혐오를 양산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주님 안에 거하는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행해지는 일은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의 대상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주님 밖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 밖에서’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합니까? 전도지나 물휴지나 알사탕 같은 거 준다고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전해야 합니다. 삶으로 주님을 전한다는 것은 오늘의 말씀대로 ‘주가 내 안에’ 거하시 하는 것이요,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면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빛나면, 그들도 궁금해지는 것이지요. “도대체 저 사람의 삶을 빛나게 하는 비결을 뭘까?”. 이렇게 전도해야 합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 거룩한 에토스 형성(습관/윤리)
그리스도인은 신앙인이기 이전에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돌아보고 고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믿쑵니다!”가 믿음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고 언제나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령’입니다. 누구에게나 성령은 이미 임재하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비로소 ‘성령의 역사’인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을 받으라!”고 권고할까요? 그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온전히 채우라는 권고요, 성령의 다스림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라는 권고입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는 만큼 공허함은 사라지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는 힘이 더해집니다.
이렇게 회개, 믿음,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에토스를 형성할 수 있고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많은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그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신다면, 주님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그것만이 우리 삶의 공허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