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톨의 무게는?
욥기 16:1-5
내일은 한가위 추석명절입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고루고루 평안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가정마다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지난주 초에는 지방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오가는 길에 보니 벌써 추수를 마친 논도 있고, 논은 어느새 황금빛 들판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황금빛 들판에서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수 홍순관 씨의 노래 ‘쌀 한 톨의 무게’가 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로 지은 노래입니다. 앞부분 가사만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 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그런데 이 소중한 쌀을 애지중지 키운 농부는 ‘밥 한 공기 분량’이 되는 쌀값으로 최소한 300원은 보장해 달라고 시위를 하는 모습을 동시에 떠올렸습니다. 커피 전문점에서 마시는 싸구려 커피가 3,500원인데, 공깃밥 열 개를 만들 수 있는 쌀값이 더 싼 겁니다. 농부들은 단지, 커피 값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니 쌀값을 인상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농사를 지어 손해는 보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한 사람이 잘살 수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요, 땀 흘린 사람의 수고를 훔쳐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는 나쁜 나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땀 흘려 수고하는 이들의 피와 땀이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세상이 아닌 정의로운 나라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 재난을 주는 위로자 -‘욥의 위로자’
‘욥의 위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를 도우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동방의 의인이자 부자였던 욥이 고난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위로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때문에 욥은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의 말이 결국은 “네가 고난을 받는 이유는 반드시 네 안에 있을 거야.”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당할만한 일을 당했다’는 식으로 우리도 부지불식 간에 이야기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를 위로해 주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욥이 그 모든 일을 자초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실수는 욥이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하시는가?”하고 말할 때 그것을 하나의 질문이라 생각했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욥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절규’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절규를 통해서 욥이 친구들에게 원했던 것은 신학이 아니고 동정이었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그만 부르짖고 불평을 그치라고 충고하는 것이 도움되는 말이 아니라 더 모욕하고 아프게 하는 말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에게는 그를 꾸짖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감싸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인내하고, 경건의 모범이 되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분노하도록, 소리치고 울부짖도록 내버려두는 친구가 욥에게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그것이 진심이었지만 욥과 같은 고난에 처하지 않은 자신들의 삶에 안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의 내용입니다.
■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에 대한 유명한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의 말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는 ‘모든 일’입니다. 말로는 쉬운데 삶으로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입대한 후에 훈련소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난주에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기적인 부모라, 아들이 좀 편안하게 군 생활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는데, 훈련이 힘들다고 유명한 ‘201특공여단’으로 자대배치가 되었다는 안내문자가 왔습니다. 서너 시간 멘붕 상태에서 ‘201특공여단’에서 받는 훈련들을 알아보니 그 중 하나가 헬기를 타고 가서 추풍령에 내려주면(내려주는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3박 4일 동안 걸어서 자대로 복귀하는 훈련도 있습니다. ‘하필이면 내 아들이’ 생각하며 원망하다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감사의 조건을 하나 둘 떠올리니 감사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감당할 시련 외에는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니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훈련이 고된 만큼 막내도 그만큼 성숙해질 것으로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은 없지만, 막내가 군 생활 하는 동안 느슨해졌던 내 생활도 바뀔 것이니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자녀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으니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게다가 남북 정상이 만나 더는 무력충돌은 없을 것이라 선언하였으니 전시체제가 아닌 것도 감사합니다.
친구들에게 아들 이야기를 했더니만, 저마다 위로해주는 이야기를 하는데 귀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에잇!” 하는데, 그 말이 위로가 됩니다. “그래 맞아, 자대배치 소식을 듣고 내가 순간 들었던 생각이 바로 그거야!” 그 탄식 섞인 한마디의 말, 그것이 바로 제게는 ‘쌀 한 톨’과도 같은 말이었던 것입니다. 쌀 한 톨에서 우주의 신비, 생명의 신비를 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별빛과 농부의 새벽을 보듯이 그 한마디 말에 들어있는 수많은 감정이 느껴지면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뇌과학에서 밝혀진 사실입니다. 명상보다도 수십, 수백 배 뇌파와 호르몬이 안정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바로 ‘감사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 한마디 말에 위로를 받고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보니 작은 일들조차도 감사하고, 비로소 저도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 작은 일에 감사하라
저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에 나오는 10절의 말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라는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충성’을 ‘감사’로 바꿔 읽으면, 지극히 작은 것이 감사하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만, 작은 것이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것에도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여러분, ‘쌀 한 톨’밖에 안되는 작은 감사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감사라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모두 담겨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작은 감사 속에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들어있다고 고백하십시오.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가져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로운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들아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 있단다. 그런데 하나는 착한 짐승이고, 하나는 악한 짐승이야.” 손자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착한 짐승하고 악한 짐승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그때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응, 그건 너희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지.”
작은 것에 감사하는 일은 착한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악한 짐승에게 먹이를 주지 마십시오.
■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조는 ‘작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제자도>를 제1장 ‘불순응’이라는 챕터를 공부할 때, 우리가 순응하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르시시즘이란 ‘자아도취’로 인간에 대한 무한 긍정하는 마음으로 가져오게 하면서, 한계를 지닌 인간성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어 결국은 자신이 절대자의 위치에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일을 이뤘다.’고 생각하면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며, 다른 이들의 도움이 손길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이런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땀 흘리고,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이니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혹여라도 이웃을 돕는 일을 해도 그 일이 자신을 돕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시혜를 베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풍조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내가 잘 났을 때에는 나보다 못난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고, 내가 못났을 때에는 그럼에도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있어 살아갈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키워갈 수 있겠습니까? ‘쌀 한 톨’처럼 작은 감사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데서부터 키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아주 사소한 것 말입니다.
■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오늘 우리가 욥기 전체를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욥기의 결론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욥기 42장 10절에 보면 고난받는 욥의 삶의 다시 반전의 삶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있는데.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욥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욥을 위로한답시고 왔지만, 상처에 소금만 뿌리고, 결국 자신들 스스로 위로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끊임없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자기 속에 있는 말을 토로함으로 마음의 평점을 찾습니다. 그런 후에 욥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고 하십니다. 아주 큰 삶의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친구들을 위한 기도’는 욥이 받을 복과 비교하면 ‘쌀 한 톨’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이 절대 가볍지만도 않습니다. 쌀 한 톨의 무게가 온 우주의 무게와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쌀 한 톨’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와 감사와 헌신과 봉사는 또한 더 작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가볍지 않습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 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이 노랫말처럼 우리의 작은 기도와 감사와 헌신과 봉사에는 하나님이 모든 신비가 다 들어있습니다. 추석 명절 햅쌀로 지은 밥을 드실 때, 나락 한 알의 무게를 가늠하시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시어 우주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