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린도후서 12:1-10
■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
오늘은 창조절 둘째주일이며, 교회연합주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재창조해주시는 창조절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교회연합 주일’이기도 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왜 ‘연합’해야만 할까요? 이 세상에 해야 할 일은 많고, 개교회가 그 일을 다 감당하기에는 연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 ‘연합’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야 한다는 깨달음이 ‘교회연합 주일’을 제정하게 한 것입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은 더불어 해야 할 일들입니다. 혼자서 하는 것 같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한 이것처럼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갈대처럼 서로 기대어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더불어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 인(人)’이라는 글자에 들어있는 의미겠지요. 연합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독불장군으로 홀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갈대처럼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 ‘삶의 기준’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인간은 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더불어 사는 것이 기쁘지만, 더불어 살려면 ‘내 기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할 때가 잦고, 내 생각을 접어야 할 때가 잦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기준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꿈처럼 혼자 살고 싶어하지만, 도인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삶의 무게’가 우리의 삶을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조건에서 어떤 사람은 ‘힘들다’하고 어떤 사람은 ‘견딜만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삶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삶의 기준’은 ‘가장 힘들었던 일을 기준으로 지금 힘들다, 안 힘들다’가 정해집니다. 극한의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신과 거래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가장 절실한 시기였기에 그런 기도는 또한 가장 진실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가장 절실하고 진실한 신앙의 자리에 서는 시간이므로 ‘극한상황 또는 위기의 상황’을 잘 극복하면 큰 자산이 됩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고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나 ‘간증’은 나와 타인을 잇는 다리역할을 합니다. 비슷한 에피소드나 간증을 가진 이들은 서로에 대해 격하게 공감하게 되므로 친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허튼 말이 아닙니다.
■ 내 삶의 기준을 버리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극한 상황을 잘 극복하고 뭔가를 이루면서 생긴 삶의 기준이 있는데, 그 삶의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강요하거나 적용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만의 척도로 평생을 살아가지 마십시오. 자신만의 척도로 이 사람 저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신앙의 잣대로 이 사람 저 사람의 신앙을 저울질하기 시작하면 독불장군으로 살아갈지언정 연합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은 그 나름대로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것 이상의 극한 경험을 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안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총회교육원 출판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겨울 신년하례회를 겸해서 함께 일하는 목사님들과 함께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로 1박 2일 MT를 갔습니다. 함께 일하던 목사님들은 7~8명이었고, 그중 제가 가장 후배였습니다. 밤에 그동안 살아온 삶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는데 저는 그 목사님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저는 함께 근무하는 목사님들 중에서 ‘나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극한상황들에 대한 일화가 없는 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 듣고 나니 ‘내가 제일 편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분들과 일할 때 제가 어떤 마음으로 했을까요? 독불장군처럼 나를 내세울 생각을 하지 않고 그분들의 생각을 존중해 주면서 일하니 그분들이 나를 엄청나게 예뻐해 주시는 겁니다. 일하는 것이 신 났지요.
내 삶의 기준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내 삶에도 변화가 오고, 관계성에도 변화가 오면서 한 식구처럼 서로 도와가며 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 있으면 그것을 보완해 주고, 장점은 살려주니까 일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분들 만나는 것도 즐겁습니다. 당시 ‘드림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 나게 일했고, 교육원도 전성기를 맞이했었고, 덕분에 저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
사도 바울은 자랑할 거리와 내세울 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그는 자신을 위하여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 12:5)”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는 자신의 출생배경도 학문도 신앙적인 확신도 로마시민권자가 아니라 ‘자기의 약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로서의 권위가 떨어질 만한 고백까지 합니다. 자기의 육체에는 사탄의 가시 같은 것이 있어서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다고 밝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가, 기도로 자기의 병도 고치지 못한다니 ‘영빨’이 서질 않는 이야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기적도 베풀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척척 응답도 해주셔야 면목이 설 터인데,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자기의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도라는 것, 사람들이 “너나 잘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약점이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였던 것입니다.
■ 연약함이 주는 유익함
사도 바울은 먼저 연약함이 주는 유익함을 ‘자만’과 연결합니다. 7절 말씀에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만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겸손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연약함이 주는 첫 번째 유익함은 ‘겸손’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 안에 머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9절에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실 때에 오히려 온전해 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하나님은 도우심을 구하는 이들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이 주는 두 번째 유익함은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연약함으로 인해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육체적인 아픔 외에도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느꼈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구나 기뻐합니다. 이것은 통상 말하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합니다. 이것은 보통의 기쁨보다 한 차원 높은 ‘온전한 기쁨’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 교회연합주일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연합’하지 못하고 개교회화 되는 데 있습니다. 교단이 다르면 물론이고, 같은 교단이라도 서로 경쟁하는 관계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과거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역교회들이 교단을 떠나 연합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로 옆에 있는 교회와도 연합하지 않습니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현상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우리 한남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간에, 교인과의 ‘연합’을 어떻게 이뤄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어진 과제입니다. 어떻게 이뤄갈 수 있을까요? 연약한 지체들을 도울 때 연합을 이뤄갈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힘들고 어려운 교회를 돕고, 공동체 내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약한 지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연합을 이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약육강식’이라는 아주 고약한 가설을 진실인 것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 한 방향으로만 달리면서 일등을 하려고 하고, 일등이 아니면 무가치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연합의 의미는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인정함으로, 모두가 일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도, 너의 삶도, 내 생각도 너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연합’이 ‘서로 연결되어 합해진다’는 뜻이니 혐오를 부추기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들을 극복하는 것도 교회의 일이겠습니다.
■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연약함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당하는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받은 은혜는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에 비하면 ‘차고 넘치는 은혜’가 아닐까요? 아직 아닌 것 같다고 여겨진다면, 연약함의 영성을 묵상하십시오. 아직도 내가 강해서 더 잘할 수 있는데, 나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이 정도에 만족할 상황이 아닌데, 이런 마음이 끊임없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기쁨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스스로 뭔가를 이뤄야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강하게 살지 마십시오. 연약함을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만큼 편안해지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이 자리에 오셔서 예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알든 모르든 ‘연약함의 영성’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기꺼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기쁘게 한 주간 살아가십시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