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바람이 되자(성령강림후 열넷째주일)
마태복음 8:23-27
지난 한 주간 내내 ‘태풍 솔릭’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기상청에서 예보한 것보다는 약한 태풍이라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도 기록적인 태풍으로 기억되는 2002년 루사, 2003년 매미가 제주도를 강타했을 때 저는 제주도에서 그 태풍을 맞이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태풍이 이는 바다를 통해서 많은 생각의 단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태풍이 온다고 하면 인간에게 주는 피해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태풍이 주는 유익은 아주 많습니다. 먼저, 태풍은 찌는 듯한 무더위를 물러가게 합니다. 강한 바람으로 공기를 맑게 하고, 바다를 저 아래부터 뒤집어 침전물과 오물을 정화하여 바다를 깨끗하게 합니다. 또한, 따분하고 자극 없는 마음에 긴장감을 주어 생기가 돌게 하기도 합니다. 기상청에서는 초기에 역대급 태풍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만, 육지에 상륙하면서 급격하게 약화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번 여름 강력한 무더위로 한반도 온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고 하니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맞는 말이지 싶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지나치게 좋아할 일도, 나쁜 일이 생겼다고 너무 실망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 그날 바람이 불 때(창 3:8)
성경에서 ‘바람’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창세기 3장 8절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바람이 불 때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람이 불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을 위해 옷을 지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죄를 짓는 순간과 그 이후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으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바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바람’은 본질을 다시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는 하나님의 전령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람’은 곧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매개이기도 합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바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바람이 가진 속성을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하시는 속성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리 삶에 불어오는 광풍조차도 우리를 침몰시키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다를 정화하듯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날 광풍이 불 때(마8:23-27)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시자 수많은 이들이 놀라고 따랐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와서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사람들과 떨어져서 쉬시고자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내 피곤하신 예수님은 깊이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살려달라고 합니다. 배에 오르기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떠올리면서, 예수님이시라면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어 잔잔하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으로 자연조차도 주님께 복종한다는 단순한 진리 정도만 얻는다면, 말씀을 너무 피상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도 광풍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사형통하리라 찬양하지만, 그 만사형통이 아무 어려움 없이 일이 척척 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태풍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자기의 길을 갈 뿐입니다. 광풍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바다로 상징되는 이 땅에서 살아갈 때 ‘광풍’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어떤 광풍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를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광풍이 불어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풍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믿음과 연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내 삶에 동행하고 계시며,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이런저런 세상의 문제들에 함몰되어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 나의 일과 주님의 일
광풍의 특징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무력화한다는 것입니다. 2002년 루사가 제주도에 상륙했을 때, 하늘을 보니 대문짝만 한 철판과 지붕이 날아다닙니다. 교육관 지붕이 갑자기 날아가고 폭우가 교육관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교육관에 서서 검은 비구름을 바라보는 내가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위눌려 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은 아실 겁니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요. 광풍이란, 이런 것입니다. 광풍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이 우리 삶으로 개입하십니다. 내가 온전히 손을 들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십시오!” 할 때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깨달음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게 하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습관이 되어 자기가 배를 저어갈 수 있는 잔잔한 호수에서조차도 노 저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면 자기의 소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자기의 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이런 유형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주님께 의지해야 할 일, 이것을 잘 구분하는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지구 온난화’로 온 지구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놓고, 인간은 발 쏙 빼고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거나, 지구의 종말이네 뭐네 하며 천국을 소망한다면 그들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온전히 인간의 과학기술과 환경운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과 다르지 않은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후자가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오!”하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이들보다는 신앙적이겠지요. ‘내 일과 주님의 일’ 이것을 잘 구분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으십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 바람 같은 사람
바람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따스한 바람은 봄바람이요, 가장 시원해서 곡식을 여물게 하는 바람은 가을바람입니다. 봄바람과 같은 따스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고, 가을바람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더위에 지친 사람에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한동안 인터넷에서 ‘강바람’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했었습니다. 한남교회 1998년 한남교회 부목사시절 옥수역 한강공원 앞에 섰는데 한강에서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땐 한남교회 오기 전에 교단에서 받았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그 모든 문제를 다 실어 보냈습니다. 그래서 ‘강바람’이라는 닉네임을 한동안 사용해서 ‘강바람 목사’로도 알려졌는데, 바람을 피우는 분들이 않아서 ‘바람’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질 않아서 제주도에 간 이후로 닉네임을 ‘달팽이’로 바꿨습니다. 이제 그 닉네임도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 삶이 ‘달팽이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늘 기분 좋은 바람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광풍이 아니라, 봄을 불러오는 따스한 봄바람, 곡식을 여물게 하는 가을바람, 더위를 잊게 하는 시원한 바람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닉네임이 있으면 하나 지어주십시오.
■ 성령의 바람
그러나 사실 봄바람, 가을바람, 시원한 바람 같은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일으킬 수 있는 바람입니다. 종교가 달라도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여기에 더해서 성령의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예수님의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죽음의 땅이 변하여 생명의 싹이 움트고,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싹이 올라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을 돌아보면 성령의 바람이 필요한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이 필요한 곳에서 ‘성령의 바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에 성령의 바람을 불어넣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그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마음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겸손과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바람을 품으려면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한 사람의 겸손과 순종은 자신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 하나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파리가 함께 흔들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창세기 8장에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대의 의인 노아, 그 한 사람 덕분에 온 가족과 땅의 짐승과 새들이 방주에 들어가게 됩니다. 노아와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이 달라집니다. 한남교회에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한 사람이 되십시오. 한남교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달라지면 이곳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의 삶의 터전이 달라질 것입니다. 바람의 시작은 아주 미약해서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바람이 태풍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작은 바람의 시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