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는 삶
빌립보서 4:10-13
지난주 내내 찜통더위가 이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목양실 에어컨이 고장 났습니다. AS 신청을 했지만, 기사들은 사나흘 뒤에나 올 수 있다고 합니다. 답답하던 차에 지리산 자락에서 목회하는 후배가 벼꽃이 피었다며 소식을 전합니다. 벼가 잘 여물려면 해가 쨍쨍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찜통더위를 대하는 자세를 바꿔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땀이 뻘뻘 흘리면서 ‘돈 내고 찜질방도 가는데 공짜니까 얼마나 좋아.’ 생각하니 견딜만합니다. “왜, 하필이면 이렇게 더울 때 에어컨이 고장 났지? AS 기사는 왜 이렇게 늦게 온다지?” 하는 생각에 꽂혔을 때에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는데, 상황은 변한 것이 없는데 마음을 바꿨더니 “살도 빼고 좋지 뭐.”하는 쪽으로 바뀌니 기분 나쁠 일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무더위에 땡볕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감사해야겠구나 하는 마음마저 생깁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객관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돌아보면 결국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 똑같은 현실도 다르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판단이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인간은 편견에 찬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타인과 대화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겠습니다.
■ 욕망의 결과
신약성경은 2천 년 전에 기록된 책이지만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기막힌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면밀하고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그렇습니다.
자족할 줄 모르는 ‘욕망’ 혹은 ‘욕심’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는 인간들 속에 있는 ‘욕망’을 부추기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많은 광고는 우리로 하여금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물건은 제품을 꼼꼼하게 살피지도 않고 유명한 브랜드면 비싼 가격에도 마다치 않고 구매합니다. 유명한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으면 자신의 가치도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명 브랜드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위신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그 사람의 위신을 세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상은 끊임없이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그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돈입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의미에서 ‘맘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맘몬,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질서에 맹종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 자족하는 사람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족하는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변변치 않은데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연출이다 뭐다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연출이라고 해도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소박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없는 남자들은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이 사회가 그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게으르며, 무능하며,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살아간다고 평가합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답니다. 그 사람들이 정답은 아니지만, 이 세상은 ‘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별난 사람 취급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빵의 문제, 밥의 문제가 사소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경제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잘 해결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먹고 사는 문제에만 붙들려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아깝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고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물질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뜻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 진짜 ‘복’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는 ‘번영의 신학’을 통해서 성장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번영 신학은 ‘예수 잘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물질과 건강까지 얻는다’는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축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인 것 같지만, 저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물질의 축복을 좋은 신앙과 일치시키면 가난한 자들의 영혼이 상처를 받게 되고, 육신이 연약하거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건강의 축복을 좋은 신앙과 결부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까? 번영 신학은 개인을 자기의 재물과 건강, 성공에 끊임없이 집착하게 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영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했습니다. 우상인 신자유주의의 체제 속에서 그 혜택을 맘껏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축복받은 신앙의 표본으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마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로마 제국의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라오디게아교회처럼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진짜 ‘복’이 아닙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조율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나머지 복은 그림자처럼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그림자가 진짜인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팽개치고 물질적인 복에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교회 역시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미 받은 바 은혜가 큰 데 감사하지 않고 부족한 것만 채워달라고 하니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9-10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 자족하는 삶을 위한 훈련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더하기의 삶에서 빼기의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덜 먹고 덜 쓰는 삶, 이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맘몬에 저항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자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자연은 파괴되어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도 수단화합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인간을 위해 자연을 변형하거나 이용하거나 취할 때에는 꼭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다른 생명과 상호관계에 의해 유지됩니다. 다른 생명을 함부로 대하면, 결국 인간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서 바다거북의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박혀서 바다거북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봤습니다. 죽은 새들를 해부해 보니 배 안에 플라스틱의 잔해가 가득합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플라스틱, 그것이 다른 생명을 죽이고 결국 인간에게도 재앙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는 거창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하나를 덜 쓰는 것으로부터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작은 플라스틱 하나도 자연 생태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셋째, 모든 생명을 서로 책임지는 관계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돌봄, 이것은 곧 나를 위하는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여기서 ‘형제’는 단순히 혈육으로 이뤄진 친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타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을 지칭하는 말이 ‘형제’입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책임지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훈련들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족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족하는 삶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 찬 세상이 비로소 보입니다.
■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 찬 세상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적인 맹인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신비는 보이지 않고, 신자유주의 질서가 만들어 놓은 경쟁과 암울한 현실만 보입니다. 맹인이 눈을 뜬다는 것은 헛헛한 세상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바라보는 이들은 세상의 헛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눈을 뜬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협동하면서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배란, 이런 감격을 서로 확증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보니까 그렇습니다 증언하는 시간이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했는데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격려하는 시간이요, 다시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를 힘입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은총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확증하는 시간, 이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공동체를 통해서 하늘과 땅이 서로 호응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요, 은총입니다. 이런 은총을 누리려면 결핍을 애달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족하는 삶입니다. 자족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로 안겨줍니다. 자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런 소중한 선물로 우리는 날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족의 신비로 인해 날마다 감사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