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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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낮아지고 천하게 보일지라도(사무엘하 6:16-23)

  • 관리자
  • 2018-07-15 18: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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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낮아지고 천하게 보일지라도(성령강림 8주/교회력)
사무엘하 6:16-23

 

 

오늘 성령강림후 여덟째 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의 성으로 옮길 때 있었던 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25장에 묘사되고 있는 ‘궤’가 바로 ‘하나님의 궤’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법궤, 증거궤, 언약궤’ 등으로도 불리며, 궤 안에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황금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궤의 뚜껑에는 에덴동산을 지키는 그룹을 상징한 천사의 형상이 있습니다. 성막의 지성소는 이 궤가 놓여있는 곳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이스라엘 진 중심에 놓고 레위 자손들이 메고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궤는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신통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 언약궤의 역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성막에서 사용될 것들을 일일이 지시하여 만들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25장에 ‘증거궤’를 만들라고 하셨고, 출애굽기 37장에 브살렐이 그 명에 따라 증거궤를 만들어 성막에 두었습니다. 증거궤가 있는 곳, 그곳은 지성소로 불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 앞까지 왔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요단 강만 건너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강물이 불어나 쉽게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기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 강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 명령대로 행하자 맨땅이 드러나 이스라엘은 무사히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 후,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에도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돕니다. 그러자 제7일에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이런 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신성시하게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의 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하자, 장로들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와 전쟁하자고 합니다. 언약궤가 전쟁터에 도착하자 이스라엘은 환호하고, 블레셋 군대는 탄식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패였습니다. 3만 명이나 죽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습니다. 언약궤마저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런데 다곤 상이 언약궤 앞에 쓰러지고 훼손되는 일이 생기고, 언약궤를 놓는 곳마다 재앙이 생깁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 다시 이스라엘로

 

 

블레셋은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언약궤를 보냈는데, 그곳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하나님께 번제와 제사를 드립니다. 그 후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를 들여다보았는데 사무엘상 6장 19절에 의하면 ‘(오만)칠십’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궤’는 아무나 들여다보거나, 만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레위 지파’에게 맡긴 것이었는데 그 하나님이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약궤는 이후로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다윗왕은 나름 예루살렘을 왕국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언약궤를 가지고 오는 것이 필요했고, 언약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는 성전도 필요했습니다. 성전건축은 아주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일이니 먼저 언약궤라도 옮겨서 백성을 하나도 묶고, 자신의 왕권도 공고하게 하는 방법으로 언약궤를 다윗의 성으로 가져오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를 3만이나 모으고 언약궤를 옮기려고 준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다시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집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기뻐할 일이었는지 상상이 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의 말씀은 이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기원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지성소를 확인했지만, 언약궤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떻게 분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언약궤는 부적인가?

 

 

지금까지 ‘언약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언약궤’의 능력이 신통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언약궤가 부적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스라엘은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이성 전투에서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언약궤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언약궤가 거룩한 물건인 것은 맞지만, 그래서 성물이기에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만, 그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이 거룩한 물건을 하나님처럼 섬긴다면 그 순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이 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은 떠나게 됩니다. 이런 논쟁은 훗날 ‘성상 파괴운동’으로 이어져 교회가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물은 거룩하게 여기되 그것을 부적처럼 여기면 안 됩니다. 성물은 어디까지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이므로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 성 전투 때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언약궤를 앞세웠음에도 졌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의하면 아이 성에서 패배한 이유는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취한 것을 온전히 바치고 이스라엘 진영에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전리품 중에서 일부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자 그들은 패배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블레셋과의 싸움은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데, 1차 접전에서 이스라엘이 패하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오지 않아서(삼상 4:4)’ 패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급하게 가져왔지만, 결국 언약궤를 빼앗기게 되었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미느하스도 죽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죽게 됩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부적처럼 생각했지만, 언약궤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뛰놀며 춤추는 것을 봅니다. 미갈의 말을 인용(삼상 6:20)하면 그의 춤 추는 모습은 ‘채신머리없는 저속한 춤꾼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율법에 제사장은 하체를 드러내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다윗이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고(삼상 6:14) 춤을 추다가 하체를 드러냈으니 미갈의 지적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 지적은 틀리지 않지만, 미갈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기쁨’입니다. 언약 궤가 무사히 다윗의 성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사울에게 기름 부으셨던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다윗으로서는 한없이 기쁜 일입니다. 그 기쁨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격하게 춤을 춘 이유는 자신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저속한 춤꾼 같다고 쏘아붙이는 미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보다도 더 격하게 춤을 출 것이요, 설령 내가 바보처럼 보여도 좋소.” 개역성경의 ‘더 낮아지고 천하게 보일지라도’가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나라는 ‘체면’을 유달리 중시합니다. 이미 조선 시대부터 ‘양반 체면에’라는 말이 있었으며, 일상에서도 “체면 구겼네!”라고 말하면 뭔가 일이 잘 안 풀렸다는 뜻입니다. 체면이라는 것은 타인의 눈에 보이는 입니다. 내가 어떠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이 보는 내가 어떤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에 익숙해서 ‘튀는 행동’을 하거나 ‘유별난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1:1의 관계인데, 자꾸만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이 중요한데 자꾸만 사람들한테 알아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잘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면 아닌데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는데 예의 없이 괴팍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더 낮아지고 천하게 보여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체가 다 드러날 정도로, 에봇을 입은 제사장(신정일치, 정교일치의 사회 –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다윗이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입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은 다윗의 기쁨도 있지만, 그런 기쁨을 주신 근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성물이요 귀한 것이지만, 그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이신 것처럼, 다윗은 이제 사울에 집안에서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 춤을 추지만, 자신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미묘한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이 미묘한 차이가 아주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 더 낮아지고 천하게 보일지라도

 

 

언약궤 자체를 능력으로 믿었던 사람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듯이,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미갈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은 죽은 날까지 ‘자식의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식이 없는 것이 저주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 상징하는 복에 관한 말씀으로 보면 됩니다. 그 당시 사회상황에서 여성이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간적인 부족함과 결점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남았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자신을 위해 충성하는 우리야를 죽이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치며 목숨을 구해야만 하는 수치도 당했지만, 그는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법궤를 가져올 때에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춤으로 영광을 돌렸던 다윗의 순수한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2절을 유진 피터슨 목사는 <메시지>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보다도 더 격하게 춤을 출 것이요. 설령 내가 바보처럼 보여도 좋소!”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낮아지고 천하게 보이는 것도 마다치 않는 다윗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일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것만 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물론, 주일 성수 자체가 부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법궤가 부적이 아니듯, 주일 성수도 부적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법궤를 통해서 나타나듯이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주일 성수를 하시고, 기왕에 주일 성수하실 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셔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큰 은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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