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2~10)

  • 관리자
  • 2018-07-08 18:21:00
  • hit2467
  • 222.232.16.100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2~10

 

 

살다 보면, 내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여력이 있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으면’하는 생각이지요. 조금만 더 돈이 있었으면, 조금만 더 배웠더라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little bit more’ 이것이 ‘여력’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하지 못하는 것에 관한 책임을 회피하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이런 삶이 방식은 ‘조금만 더’가 채워지면 또 다른 여력을 핑계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여력이 생기면, 힘이 생기면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력이 없어도 지금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미 부족한 것 같고, 연약한 것 같은 지금 이미 모든 것은 충분하고 완벽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력이 아니라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연약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 본문 중에서 서신서의 본문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본문 분석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2-6절 말씀 / 하나님을 위해서?

 

 

2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에서 그 한 사람은 바울 자신입니다. 3인칭을 써서 자신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십사 년 전’에라고 구체적으로 말한 이유는 비록 환상과 계시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 하늘’은 어떤 공간적인 장소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한계를 초월하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갈 때에 ‘이끌려 갔다(2,4)’고 하는데 다른 번역본에는 ‘붙들려 올라갔다’고 해석되어있습니다. ‘이끌려’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르파겐타ἁρπαγέντα’인데 부정과거 분사로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행동으로 이끌려 올라갔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2~3절에는 ( )안에 문장이 있습니다. ‘그가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라는 표현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리게 합니다. 장자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깨서는, 자기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호랑나비가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 이야기에서 나온 사자성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바울이지만, 이것을 자랑하기보다는 자기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6)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런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 그것은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 7절 말씀 / 제 몫의 십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바울이 혹시라도 교만하여 넘어질까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에 가시 = 사탄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가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소코로오σοκόλοψ’인데 말뚝이나 뾰족한 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육신에 말뚝을 줬습니다.’라고 번역한 번역본도 있습니다. 이 ‘말뚝’은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지고 가야만 하고(눅 9:23), 못 박혀야 하는 십자가(롬 6:6, 갈 2:20)입니다. 이 사실이 사실 언제나 인간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면 그 ‘복’이 ‘세상의 복’ 개념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초등학교 시절엔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착한 일을 해도 고난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때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는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감당해야 하는 제 몫의 십자가’입니다. 그로인해 자만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 8절 말씀 / 기도의 대상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이 지나가기를 세 번 기도했듯이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 주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것은 세 번 기도하고 말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복하고 지속해서 여러 번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지속해서 기도했다는 것은 바울의 육체적인 고통이 바울이 여러 번 고쳐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참기 어렵고 극심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기도를 누구에게 드립니까? ‘주께 간구하였더니’라는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 기도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사야 53장 3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멸시를 받아 버림받는 경험을 하시어 바울의 질고를 아시는 주님, 그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가장 힘겨운 질고를 겪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어떤 어려움도 익히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주님만이 우리 기도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의 질고도 알지 못하는 우상에게 절하고 기도하는 일이 헛된 이유입니다. 여러분, 뭔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 그 필요를 위해 무엇을 하십니까? 그때에도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한다면 그 삶은 기도하는 삶이 아닙니다. 재물이 필요하다고 해서 로또를 산다면, 그는 로또라는 우상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기도의 대상임을 기억하십시오.

 

■ 9-10절 말씀 / 거절당한 응답

 

 

이렇게 기도하는 바울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 -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바울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미 너에게 충분한 은혜를 주었다. 그리고 나의 능력도 약한 데서 온 것이다. ‘족하도다’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아르케이ἁρκεί’라는 현재형입니다. 이 단어는 1회에 한해서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만족할 만큼, 충분히, 지속적으로 채워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확신하게 하시고,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겸손하게 하셨으며, 그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완전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만일, 바울이 연약하지 않아서 모든 일은 자신의 능력으로 다할 수 있었다면 겸손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조개는 살 속의 박힌 모래의 고통을 극복하려고 분비물로 감싸 진주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바울 역시도 육체의 가시를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체의 가시를 감싸 진주 같은 신앙을 빚어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의 기도가 거절당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은혜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음으로 연약함에 머물러 있었고, 연약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 연약함의 영성

 

 

쇠뜨기라는 풀이 있습니다. 한번 밭에 퍼지면 여간해서는 없애기 어려운 풀입니다. 뿌리가 엄청나게 깊고 길게 퍼지는데 속설에 의하면 강원도에서 뿌리내린 뿌리가 부산까지 이어진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쇠뜨기는 마디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주어 잡아당겨도 툭툭 끊어집니다. 엄청나게 약하지요. 그러니 제아무리 김을 잘 매는 분이라도 쇠뜨기를 다 제거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잡아당겨도 툭툭 끊어지는 연약함이 그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학자들은 앞으로 30년 이상 그 지역에서는 초록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초록 생명이 폐허의 땅을 비집고 올라왔는데 그것이 쇠뜨기였고, 쇠뜨기를 보면서 전쟁의 패배로 절망했던 일본인들은 큰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셋도 아들을 날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노스’는 ‘유한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 오히려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초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언젠가 끝난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약자의 편입니다. 편향적입니다. 언제나 사회적인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시며, 그들이 힘에 겨워 부르짖으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강한 자들과 부한 자들에게 편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역설적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는 길이 열렸고,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약할 때, 여러분의 한계를 느낄 때 두려워하지 마시고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연약함의 영성’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아르파겐타, 소코로오, 아르케이

 

 

헬라어 ‘아르파겐타ἁρπαγέντα’는 바울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행동으로 이끌림을 받았음을 확증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삶을 하나님이 주장하도록 하십시오. 내 삶이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자신을 위한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헬라어 ‘소코로오σοκόλοψ’는 ‘제 몫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약함, 부족함을 흠으로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기도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느끼는 아픔보다 더 깊은 아픔을 아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헬라어 ‘아르케이ἁρκεί’는 ‘만족할 만큼, 충분히, 지속해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항상’과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연약할 때에 하나님이 떠나계신 것이 아니라, 그때에 오히려 우리 안에 깊이 들어와 계셔서 나를 엎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 예화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 품에 안겨서 지나온 삶을 돌아봅니다. 기쁜 시절들을 돌아보니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데 선명한 발자국이 네 개가 찍혀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아팠던 시기엔 발자국이 두 개밖에 없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내가 힘들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땐 네가 너를 엎고 걸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약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때에 오히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여러분의 고백으로 삼고 살아가십시오. 여력이 생기면 어떤 일을 하겠다고 하지 마시고, 연약함을 주님께 맡기고 힘써 일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연약함의 영성입니다.*

 

(김민수 목사)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