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사순절 2주
계산하지 않는 신앙
창 12:1~4

봄의 기운이 완연한 춘삼월입니다. 따스한 햇살과 바람이 지천에 꽃을 피우고 연록의 싹을 틔우는 계절처럼 여러분의 삶도 꽃피우시길 소망하며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이에 응답하는 내용입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이 아주 많은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아브라함은 복을 주시려고 불렀고, 우리에게는 영생의 삶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이 먼저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제적인 부르심과 응답이 상호작용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부르셔도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삶, 그 삶의 끝은 모든 허무와 사망입니다.
지난주에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했던 아담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담은 불순종했지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친히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도 이마에 표를 주어 해를 당하지 않고 살게 하셨습니다. 거듭되는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기회를 주었고, 마침내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성 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상호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에덴동산, 바벨탑, 노아의 홍수, 출애굽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된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급기야 예수님을 보냈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선민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을 넘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복’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요, 하나님께서 삶의 배후에서 지켜보시며 도와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순종한 후에도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게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고,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지켜보셨고, 그의 배후에서 그를 도우셨고, 하나님의 뜻을 그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은 복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잠시 넘어질 때도 있고, 엇나갈 때도 있고, 부족한 것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시고, 바로 잡아주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런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하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할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복된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시고, 바로 잡아주시고, 채워주실 것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 삶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 확실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불확실성이 불안과 두려움의 근원이고,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인간은 뭔가 기댈 언덕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기대는 언덕은 물질일 수도 있고, 명예일수도 있고, 진리에 대한 탐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유한한 것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그 무엇, 그것을 동양에서는 도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신비 혹은 절대자라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여겼고, ‘한 분, 하나’라는 우리말의 뜻이 더해지면서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느님이라고 하면 무슨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는데 그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몰이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규정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도나 신비나 절대자가 이름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도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면 안 되기에 구약성서에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엘, 엘로힘, 야훼’등 하나님을 표현현하는 이름이 30여 가지나 되지만,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결말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소망할 뿐입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으로 인해 오는 두려움에 빠져 살지 않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고 싶지만, 저도 그분을 다 알지 못하고 제가 아는 것조차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땅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합니다.
이 나이는 지금의 75세와 비교해서 노인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75세는 상징적인 나이로, 그 정도의 나이면 산전수전 다 겪은, 세상의 쓴맛단맛 다 본, 이력이 붙은, 알 건 다 아는 나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이가 되면 모험보다는 안정된 삶과 익숙한 삶을 선호합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라고 하신 그곳이 어딘지 알지 못하는데도 아무런 계산도 없이 그 나이에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약점도 있고, 한계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실 때 계산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 이삭을 바칠 때도 같습니다. 계산해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도무지 맞지 않는데, 그냥 계산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여러분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떠나라, 가라!”, 떠난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75년 동안 익숙하게 살던 삶의 터전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떠나라고 하십니다.
익숙한 믿음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신앙생활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육체의 행실을 버리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육체의 행실은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 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 같은 것들’(갈 6:19-21)입니다.
또 세상이 주는 온갖 허위의식과 두려움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십니다. 떠나라고 하셨으니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지켜주시고 복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이 “그건 이상적인 이야깁니다.
계산해 보면,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재고, 판단하고, 계산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결단을 할 때에는 인간적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춰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의 조율이라고 합니다. 내 생각과 내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조율될 수가 없습니다. 조율되지 않은 삶은 자기가 가진 음색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악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라고 할지라도 조율되지 않는 악기를 가지고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조율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피아노를 조율하듯 해야 합니다. 조여주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고, 낡은 줄은 갈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가 되어 있으면, 좋은 연주가만 만나면 최상의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연주하시는 아주 훌륭한 연주가이십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연주를 하시고, 그것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영감을 얻고 기쁨을 얻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연주가이신 하나님께 잘 어울리는 악기, 조율된 악기는 계산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쓰이지 않는다고, 복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쓰일 날이 있음을 믿고, 조율된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누룩이 빵을 부풀게 하듯이, 아주 작은 믿음이 우리의 삶을 영생의 삶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아주 작은 불순종이 우리의 삶을 사망의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사무엘상 15장 22절의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도 기억하십시오.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은 순종이라는 믿음의 누룩을 품고 영생의 삶으로 나아가는 분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떠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떠나야할 곳에 미련을 갖고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옵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도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오시어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는데, 우리는 늘 우리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며, 온갖 손이익을 계산하며 약사빠른 신앙생활을 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게 하시고, 우리가 결단해야할 때에는 지체없이 결단하게 하옵소서. 불의한 길에서 떠날 때에는 더욱 더 단호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우리의 삶을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