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생명의 씨앗을 품은 사람(마가복음 4:26-34)

  • 관리자
  • 2018-06-17 18:16:00
  • hit1563
  • 222.232.16.100

성령강림후 넷째주일/교회력설교
생명의 씨앗을 품은 사람
마가복음 4:26-34

 

올해는 제게 각별한 해입니다. 한동안 포기했던 꿈,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꾸게 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역사에 눈을 뜨면서 이 나라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분단’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화통일은 제 젊은 시절의 기도제목이었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도 가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 유럽도 가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총회본부에서 근무할 때,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다녀오고 식량원조사업의 하나로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있는 선죽교도 방문하여 북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경험은 청년 때부터 꾸었던 꿈을 더욱 구체화했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통일대박론’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들이 횡행하면서부터 이 꿈은 점차 희미해졌고, 올해 초 한반도 전쟁위기설까지 나돌면서 저는 이 꿈을 접었습니다. 청년 때에는 내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도 꾸었는데, 8월 입대를 앞둔 아들을 보면서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과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을 보면서 다시 그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도 가고 신의주도 가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까지 가는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입니다.

 

덴마크에 갔을 때, 버스를 타고 국경을 건너는데 아무런 검문검색 절차도 없이 스웨덴을 오갑니다. 프랑스에 갔더니 스위스와 프랑스를 오가는데 검문소는 있지만, 그냥 오갑니다. 그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배나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는 나라에서 살다 보니 육로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북한을 가는데도 통일교육원에 가서 교육받고 허가받은 것도 부족해서 검문검색하고, 돌아올 때에도 검문검색이 삼엄하고, 돌아온 후에도 북한 사람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국정원에서 관심 두는 나라는 얼마나 폐쇄적입니까? 그런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찌 세계를 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적처럼 이 나라도 평화의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민족에게 이뤄지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매일매일 새로운 말씀

 

‘꿈을 꾼다는 것’은 이렇게 신이 나는 일입니다.

‘꿈’은 ‘씨앗’을 품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어진 교회력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신묘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길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구약의 본문 사무엘상 15장 34~16장 13절의 말씀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내용’입니다. 사울을 내치시고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는 하나님, 마치 이번 6월 13일 지방선거의 결과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서신서 고린도후서 5장 6-17절의 말씀은 더 구체적입니다. “선악 간에 그 행한 것을 따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력은 이미 정해진 것인데 어찌 이리도 우리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가 신기합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서두가 조금 길었습니다. 오늘은 교회력 본문 중에서 복음서 마가복음 4장 26-34절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왜 비유인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비유로 말씀하신 말씀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 비유’도 모두 “하나님의 나라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어떤 일을 ‘비유와 은유’로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는 크게 보면 세 가지 이유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대놓고 비판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조롱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는 은유의 언어가 가득한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초대교회를 향한 압박이 너무 심한데 대놓고 비판했다가는 아예 초대교회가 뿌리째 뽑혀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뿔이 열 달리고 머리가 일곱인 짐승(계 13:1)’ 혹은 ‘붉은 용’ 등으로 표현합니다. 유신독재와 군부독재가 통치하던 우리나라도 1970~80년대에 ‘은어’가 많았습니다. 직접 대놓고 비판할 수 없으니까 은어로 절대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언어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경우에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어떤 광고에 “남자들한테 좋긴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라고 말함으로 자신들이 광고하는 약의 효능을 설명하지도 않고도 상품을 팔기도 합니다. ‘남자들한테 좋은 것’은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광고함으로써 소비자 각자가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좋은’이라는 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 믿게 하여 상품을 구매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이것은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고 설명될 수 있는 존재라면 하나님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인간의 언어에 의해 규정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존재 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도 존재하지만, 비유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는, 직접화법으로 이야기하면 듣는 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만일 갑작스럽게 본의 아니게 이해되면 너무 큰 충격에 빠질 것이므로 비유를 듣고 깊이 생각하는 이들만이 그 비유의 뜻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고 하셨고, 제자들에게 일일이 또다시 비유를 해석해 주신(막 4:34) 것입니다.

 

■ 자라나는 씨의 비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먼저 ‘자라라는 씽의 비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와 같다는 것이죠. 씨를 뿌렸는데 아무리 쳐다봐도 자라는 것 같지 않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싹이 났습니다. 또 몇 날이 지나자 이삭이 나오고, 추수할 때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씨 뿌린 사람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씨앗이 자라나려면 생명이 있는 씨앗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죽은 씨앗, 생명이 없는 씨앗은 뿌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씨앗은 땅에 뿌려져야 합니다. 뿌려지지 않은 씨앗은 싹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씨앗은 자라나는 단계를 건너뛰지 않습니다.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씨앗은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씨앗은 땅이 자라게 하지만 농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한자 ‘쌀 미(米)’가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맺기 위해서는 농부가 논에 88번을 드나들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열 십’ 자 아래위로 ‘팔’ 자를 붙여놓은 형상입니다.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저는 이런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 있는 씨앗인데, 이 세상에 구원의 희망이 남아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뿌려졌으며, 그 씨앗은 지금도 자라는 중입니다. 언제가 추수의 때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추수의 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홀로 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꾼을 부르시어 땀 흘려 가꾸게 하시고, 추수 때에 부르심에 응답한 일꾼들과 함께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이들은 추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응답하신 분들입니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88번 논을 오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 겨자씨의 비유

 

사실 겨자씨는 씨 중의 가장 작은 씨는 아닙니다. 그냥 바람에 날아갈 만큼 작습니다. 씨를 뿌려보니 겨자씨보다 상추씨가 훨씬 작습니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정말 가장 작은 씨앗이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앙생활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우리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혁명도 아주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겨자가 자라 모든 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만큼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이 무슨 사자가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생각했습니다. 올봄에 겨자씨를 뿌렸습니다. 상추와 함께 뜯어서 겨자 쌈을 맛나게 먹기도 했었지요. 겨자가 아무리 커도 초본이요, 겨자보다 큰 초본들은 넘쳐나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상식을 초월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초본이 나무처럼 자라는 경우가 간혹 있기도 합니다. 지팡이의 재료로 가장 좋다는 명아주는 초본이지만, 잘 자라면 나무처럼 딱딱해집니다. 가벼운데다가 딱딱하니 지팡이의 재료로 좋은 것이지요. 중동지방에서 겨자가 간혹 그렇게 자라기도 했는가 봅니다. 교회 앞 화분에도 초본인데 나무가 된 식물이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 같지만,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무슨 거창한 일을 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공중의 새들 같은 작은 이들이 깃드는 곳입니다.

겨자씨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갑니까?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편만하게 이뤄진 곳’이며, 그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느끼는 나라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는 분들이 우리의 육체가 소진되어 시간 안의 유한한 삶을 끝내고 시간 밖의 영원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 생명의 씨앗을 품은 사람

 

생명의 씨앗을 품은 사람은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다 부질없다고 포기한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평화통일을 꿈꾸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여행을 가겠다는 꿈 역시도 생명의 씨앗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에는 어떤 ‘생명의 씨앗’을 품었습니까? 그 씨앗은 살아서 자라나고 있습니까? 그 씨앗이 잘 자랄 만큼 옥토입니까? 좋은 씨앗, 생명의 씨앗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 밭도 그 씨앗을 잘 키워낼 수 있는 좋은 밭이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