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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끗한 그릇인가?(디모데후서 2:20-26)

  • 관리자
  • 2018-06-10 1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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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끗한 그릇인가? / 성령강림후 셋째주일 / 총회선교주일
디모데후서 2:20-26

 

지난주에 ‘일상에서 발견하는 거룩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거룩함이란, 특별한 곳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에서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메시지>에서 ‘일상의 삶이 곧 질그릇’이라는 탁월한 해석을 했고, 그 일상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면 그 때문에 삶은 빛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간, 이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위해 힘쓰셨을 줄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가려고 하니까 쉽던가요? 어렵죠. 머리에 들어있는 고백이 삶으로 살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마시고, 더욱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 토기장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질그릇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의 말씀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종류가 나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이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상징적으로 보자면 ‘그릇’은 사람을 뜻하고, 그 그릇에 담기는 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영’을 가리킨다 볼 수 있습니다. 그릇에 담기는 하나님의 심오한 영을 ‘물’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눈에 보이는 물의 빛깔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눈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 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있다고 어떤 물은 마셔도 좋다 하고, 어떤 물은 마시면 안 된다고 합니다.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맑은 물이 담겨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자면 ‘그 그릇이 깨끗하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물도 더러운 그릇에 담으면 마실 수 없는 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깨끗한 그릇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어떤 그릇이 되느냐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금 그릇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다 보니 그릇의 크기가 얼마인지, 물을 담을 만큼 깨끗한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이 크기나 쓰임새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8장에 토기장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런저런 토기를 만드십니다.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 그 결정권은 토기장이신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릇이냐가 아니라 깨끗한 그릇인가입니다.

 

■ 나는 깨끗한 그릇인가?(1)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를 빚어 만들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은 깨어지기 쉬워서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유리그릇이라면, 청소년기는 깎고 다듬어서 좀 더 세련된 그릇으로도 만들 수 있는 나무그릇이고, 청년기는 제법 형태가 잡힌 놋그릇이었다면, 중년기는 불순물이 걸러진 은그릇이요, 노년기는 그동안 삶의 경험과 신앙고백이 여물어 변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금 그릇으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그릇이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습니다. 한 집에 여러 가지 종류의 그릇이 있는 이유는 다 쓰임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릇이냐가 아니라, 주인이 쓰려고 할 때에 쓸 만한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음식을 만들었어도 더러운 그릇에 담이 먹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금 그릇이라고 모든 음식을 담는 최상의 그릇이 아닙니다. 사발에 담겨야 제맛을 내는 것이 있고, 나무 그릇에 담겨야 제맛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금 그릇과 은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그릇입니까, 쓸모 있는 그릇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어떤 그릇이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쓸모 있는 그릇이 되는 데 관심 두시기 바랍니다. 쓸모 있는 그릇이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그릇’이라고 지금까지 표현했지만, 그 그릇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성경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심령’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21절의 말씀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깨끗한 그릇이 되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에 온갖 종류의 복된 선물을 담아 하나님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이 된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선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온갖 종류의 선물을 갖고 계시는데, 그것을 담을만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온갖 선물을 담는 그릇, 여러분이 그런 그릇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산상수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십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비어있다는 말과 통합니다. 그릇에 무엇을 담으려면 비어 있어야 합니다. 가득 차 있으면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더러운 것, 세상의 욕심과 세상살이로 말미암은 근심 걱정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담길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할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을 수 없습니다. 그 보배를 담지 못하니 이웃들에게 나눌 하나님의 온갖 선물들도 담을 수 없습니다. 담은 것이 없으니 나눌 것도 없고, 나눈들 세상의 욕심과 근심 걱정이니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세상의 욕심과 세상살이로 말미암은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깨끗한 그릇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와 상통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을 비우고 이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비워야 비로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움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로 결단하는 순간 성취되지만, 구원받은 삶의 증거는 매일매일의 삶을 비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다양한 그릇들을 식사때마다 설거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번 설거지했다고, 그냥 그곳에 계속 음식을 담아 먹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은, 다시 음식을 담아 먹고 설거지할 것이니까 설거지가 필요 없다고 하실 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욕심과 근심·걱정을 말끔하게 씻어낸 것 같은데, 어느 사이에 또 우리 마음에 둥지를 틉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실망하지 마시고, 또 그것을 비워내고 주님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의 심령에 오직 주님만 가득하게 되는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 나는 깨끗한 그릇인가?(2)

 

그릇을 씻을 때 무엇으로 씻습니까? 물로 씻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할 때는 무엇으로 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깨끗합니다!”라고 할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자들에게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임한 구원입니다. 구원은 내가 깨끗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삶을 흉내 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복음서에서 증거되었고, 바울 서신을 통해서 그 깊은 의미들이 체계화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성경이요, 성경 중에서도 신약성경이요,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깨끗한 그릇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자의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듣고, 눈으로 묵상하며, 삶을 살아가는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지침이 되고,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의 지침이 되면 우리의 삶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에는 깨끗한 그릇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 깨끗한 그릇이 되는 방법

 

이제부터는 조금 진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진부한 이야기란, 고리타분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본질에 접근하려면 결국에는 진부한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신한 것이 아니라 진부한 것이 된 이유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방법을 사용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2절부터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세 가지입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 여기서 ‘정욕’으로 번역한 단어의 본래 의미는 ‘방종’입니다. 방종이란, ‘책임과 의무가 따르지 않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육체적인 욕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책임을 다하고 의무를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책임과 의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그 축약된 내용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성실하고 책임 있게 감당할 때, 하나님 자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복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무는 하지 않고 복만 달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복주의는 정욕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의’를 추구하라.- 성숙한 의란 ‘믿음과 사랑과 화평(평화)’입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요, 성숙한 의를 추구할 때에 우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온전히 깨끗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시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숙하지 않은 의’도 있는가 하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있습니다. 성숙하지 않은 의는 어린아이의 신앙 같아서, 고난이 오면 넘어집니다. 신앙생활 잘하면 상 받는 줄로만 생각합니다. 상 받는 것은 맞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면 고난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의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의를 추구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공허한 논쟁을 피하라. - 논쟁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공허한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허한 논쟁은 언제나 다툼으로 끝납니다. 공허한 논쟁을 피하는 방법은 들어주는 것입니다. 귀 기울여 들음으로 우리는 공허한 논쟁을 피할 수 있고,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많이 듣는 훈련을 하십시오. 될 수 있으면 해야 할 말만 하십시오. 그러나 꼭 말해야 할 때에는 침묵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공허한 논쟁이 아니라, 성숙한 의를 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책임 있게 감당하시고, 성숙한 의를 추구하시고, 공허한 논쟁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 들리워 쓰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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