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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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니라 ‘삶’(요한일서 4:1-6)

  • 관리자
  • 2018-05-27 1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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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첫째주일
‘말’이 아니라 ‘삶’
요한일서 4:1-6

 

■ 성령강림주일 설교 요약

 

지난주 성령강림 주일에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사건은 ‘신비한 체험’인데, 이 신비한 체험이 우리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인 증거는 ‘삶의 변화’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이렇게 산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복음의 골자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후, 가장 눈에 뜨이는 변화는 그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단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전했던 복음의 골자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중심에 있었고,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를 속죄양으로 주시어 십자가 고난을 겪게 하셨으므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거는 우리 곁에 있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신약성경의 축약된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런 변화된 삶의 양식은 세상 삶의 양식과는 달라서 환난과 핍박을 받을 수도 있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리의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가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 ‘말’의 양면성

 

그런데 성령이 임할 때의 불의 혀처럼 각 사람에게 임했으며, 신비한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의 첫 번째 변화가 ‘방언’이었다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성령 받았다 = 방언 받았다’를 동격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방언일까요? 쉬워서 그렇습니다. 왜 쉬울까요?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마음과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혀’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 많고, 잠언에서는 혀를 잘 다스리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잠언 15장 2, 4절에서는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면서, 혀를 잘 제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지만, 진정성과 사랑이 없으면 그 천사의 말이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악한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말인지 아닌지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가 아니라 삶이 아름다운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거짓설교자들

 

초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1~3세기를 풍미하던 이단사상인데,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의 이원론적인 생각에 따르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저주받은 인간의 육체를 입은 것도 용납될 수 없었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초대교회에 침투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했고, 그 때문에 결국 십자가의 부활도 부정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부정함으로 ‘속죄양’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의 모든 예언을 폐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과 십자가와 부활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웠습니다. 요한일서에는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짓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거짓된 교설을 말하는데도 성령체험을 한 사람 중에서도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이런 현상은 초대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중세기독교 시대에는 아예 교회 안에 거짓사설들이 들어와 종교개혁을 해야 할 만큼 타락했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거짓설교자들이 여전히 활약했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단 사설들이 교묘하게 횡행하고 있습니다. 1~3세기 영지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면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했다면, 중세교회에서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속죄양 예수 그리스도를 면죄부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경과 심지어는 신조까지 다르지 않은데,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거짓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거짓 설교자들이 자신까지도 속여서 자신이 거짓 설교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며,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 교주가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예 신천지나 구원파처럼 드러내놓고 복음을 훼손하면 이단이려니 알 터인데, 정통 교단에 소속된 교회와 목사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거짓설교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 거짓설교자들이 득세하는 이유

 

그들의 설교는 달콤합니다. 힘이 있고, 청중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호했고,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대형보수교회와 단체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거짓설교자들이 판을 칠 수 있을까요?

거짓설교자와 그것을 듣는 이들의 욕망이 접점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거짓설교자들은 끊임없이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말하지만, 개인구원의 차원과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로 복음을 축소하면서 모든 신앙생활의 결론을 ‘개 교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로 바꿔버렸고, 그것마저도 거짓설교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신’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대형보수’라는 딱지를 붙일만한 교회에 가보십시오. 그 교회에서 목사는 거의 하나님 수준입니다. 교인들은 신앙 생활하는 것이 편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목사에게만 잘하면 다 해결됩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의 신앙이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거짓설교자들은 자신들의 거짓사설이 들통 날까 봐 교인들이 신앙의 질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하고많은 날 “믿습니까, 아멘!”은 반복되는데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교인들은 적당하게 위안받고, 적당하게 회개하고, 거짓설교자들은 그렇게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통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고, 그들만의 교주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도들의 말을 듣지만,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는 거짓선지자들, 미혹하는 영의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거짓설교자들의 말에 혹하여 “아멘!”하고 감동 받아 눈물 콧물 다 빼고 헌신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니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말 잔치만’ 풍성합니다. 삶 없이 말로만 하는 죽은 신앙, 이것이 거짓설교자들을 득세하게 한 원인입니다.

 

■ 엉터리가 너무 많다!

 

베를린 교회의 파송선교사로 우리 교단에서도 8년 동안 선교사로 봉사하기도 했던 독일인 이말테 목사는 27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교회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지난 24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는 충격적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엉터리 목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의학을 3년 공부하고 의사가 된다고 하면 다들 웃기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한국에서는 신학을 3년만 공부했어도 목사안수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엉터리 목사가 너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신학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지도 못하고, 성경을 읽고도 말씀의 의미조차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겨우겨우 한글 성경만 읽는데, 한글성경은 이미 번역과정에서 한국의 유교(문화)적 이해가 배어있는데 이런 문화적 해석의 차이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엉터리 목사들이 무슨 역사의식이 있겠으며,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영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엉터리 목사들이 교주가 되어 있는 현실, 그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라는 것입니다. 기장도 이런 패턴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군입대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13년 걸리던 목사안수과정이 6년 정도로 단축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일반학부 출신도 대학원 3년만 공부하면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3년 동안 한신성을 배우고 그것이 삶으로 체화될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환상이겠지요.

 

■ 영을 분별하라!

 

본문 1절에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것을 구분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제시한 대로,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것, 즉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는지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 즉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는지 아닌지를 보면 거짓 영인지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이 기본적인 원칙은 같습니다. 그러나 워낙 교묘해져서, 말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다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부정하는 이단 사설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을 통으로 보면 ‘영을 분별하는 분명한 지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이 기본 원칙이고, 누구의 말을 듣는가가 중요합니다. 6절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초대교회의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해있으므로 ‘진리의 영’입니다. 그들이 들려준 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복음의 골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함으로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고자 힘쓰는 이들은 ‘거룩한 영’에 속한 자들이요, 말로만 화려한 이들은 ‘미혹하는 영’인 것입니다.

 

■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분명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대립하고 있을 때, 진리의 영에 속한 말을 들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분명하게 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전하지만, 이것은 진리의 영일 수도 있고, 미혹하는 영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말씀을 듣고 삶으로 살아가고자 힘쓰신다면, ‘진리의 영’이 들려주는 말을 들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말씀을 듣고 머리로만 이해하신다면 ‘미혹하는 영’이 들려주는 말을 들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의 참뜻을 알려주기 위해 이런저런 개념들과 신학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말씀을 전하지만,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예수님의 삶을 흉내 내며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신 분이셨습니다. 말로만 섬기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고, 돌아가시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과정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의 한계를 알게 되므로 더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고, 그 신비한 체험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일상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들으신바 그 말씀대로 사십시오.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삶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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