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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체험의 일상화 성령강림주일(20180520)

  • 관리자
  • 2018-05-20 17: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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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체험의 일상화 성령강림주일(20180520)
사도행전 2:14-21

■ 패러다임(신념, 가치 체계)


미국의 사회과학자 토머스 쿤(Thomas Kuhn 1922-1996)은 ‘자스트로우 Jastrow 도형’으로으로 불리는 ‘오리-토끼 그림’을 제시하면서 ‘패러다임’에 대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패러다임이란, 신념, 가치 체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념과 가치에 따라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하면, 똑같은 사물 혹은 사건인데 ‘그렇게 보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출을 보는데,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움직이는 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움직이는 지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깁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패러다임으로 태양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사실임이 과학적으로 밝혀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천동설을 부정하면 마녀사냥까지 당했던 흑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 메타노니아(회개, 거듭남)


잠시 과학이야기를 했지만, 종교적 경험의 형태도 이와 다르지 않게 일어납니다.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이 겪은 수많은 전쟁과 고난이 역사가들에게는 이스라엘과 인접국가 간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사건일 뿐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을 인도하고 훈련하시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뤄가시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일상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소중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늘상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일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18-20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밝히면서,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그의 신성을 보여주셨지만, 경건하지 못한 불의한 자는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만물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보여주셔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관과 패러다임을 벗어버리고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 눈뜸의 기적, 회개(메타노니아), 성령 받음’입니다.


■ 신비한 체험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 체험사건’은 신비한 체험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 체험’을 기대하고 고대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성령에 대해 왜곡된 인식이 있어 ‘성령 = 방언’을 주로 생각하지만,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분입니다. 또한, 성령은 승천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 남아있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모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성령이라는 ‘신비한 체험’을 ‘일상적인 삶의 형태’로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경험의 일상적 형태’라고 표현되는데, 종교적인 경험이 ‘삶의 전환점 turning point of life’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비한 체험’을 했다거나, ‘성령을 받았다’ 혹은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 패러다임의 변화 = 메타노니아

 


패러다임의 변화,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메타노니아 metanoia’로 표현되었습니다. 생각을 바꿈, 달리 생각함이라는 일상적인 뜻을 넘어 종교적으로는 ‘회개, 회심’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과정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거쳐야 할 관문입니다.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인 ‘통과제의’가 바로 ‘메타노니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이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회심하고, 그 이전까지의 자신을 철저하게 버렸습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서 바울의 삶 전체가 바뀌었고, 그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그의 인간성뿐만 아니라 역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도 터득했던 것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신비한 체험을 한 후에도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갔다면, 그의 신비체험은 어릿광대짓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않는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인 형태’는 환상이나 환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비 체험을 ‘성령 체험’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망령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개인적인 경험

 

 

저는 찬양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던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온누리교회에서 ‘목요찬양’집회가 열릴 때, 청년들을 데리고 함께 참여하기도 했고, 찬양단을 꾸려서 찬양집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목요찬양집회는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5월, 저는 그 집회를 마지막으로 목요찬양집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누리교회당을 가득 메운 청년들이 찬양하며, 눈물 콧물 흘려가며, 두 손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찬양하는 그 시간에 또 다른 청년들은 거리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라며 집회를 열고, 시위를 하다 최루탄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음에도, 찬양의 기쁨의 넘쳐나는 그곳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단 한마디 언급도 기도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와 무관한 종교, 역사에 무지한 종교, 역사와 단절된 신비체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쟁을 찬양하는 노래들이 불리고, 신학적인 내용도 빈약한 리듬에 환호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클럽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냥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죄를 덜 짓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당시의 그 경험 역시도 ‘신비한 체험’이었습니다. 어떤 찬양을 불러야 하는지, 찬양으로 뜨거워지는 것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등등 찬양에 대한 본질에 대한 깊은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러야 할 아름다운 노래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신학적인 내용이 함축된 복음성가도 좋아하지만, 철학과 사유가 깊은 가요도 좋아합니다.

 

■ 성령의 사람답게


신비 체험,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그 체험이 일상의 삶으로 열매 맺지 못하고, 신비 체험이 그런 체험을 못 한 이들을 낮잡아 보는 장치로 작용한다면 그 신비한 체험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신비 체험은 했으되 일상의 삶으로 살게 되지 않는 이들이 공통으로 이르는 종착지가 있는데 그곳은 바로 ‘교만(자만)’이라는 종점입니다. 교만과 자만은 ‘하나님처럼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기에 ‘멸망의 선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는 보지 못한 찬란한 빛을 내는 어떤 빛나는 광채를 보았든지,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소리를 들었든지, 아니면 스스로 치유하는 기적을 행했든, 어떤 신비적인 경험을 했을 때, 그것이 전환점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기독교적으로 변하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간다면 그는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요,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성령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1-2)”

 

■ 성령의 시대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17절은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오순절 신비한 성령체험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은 ‘pneuma’로 히브리어 ‘haya=YHWH’이며 ‘ruah 바람’이며, 모세가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ehyeh asher ehyeh’라고 하신 분입니다. 다소, 생소하고 어려운 이 단어와 문장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존재이신 하나님은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고, 이름도 알려주시지 않으셨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종교를 갖는 궁극적인 이유는 종교적인 이론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경험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 종교적인 경험은 ‘느낌, 체험’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체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Numinose 성스러움’의 상태로 접어듭니다. ‘누미노제’는 독일의 신학자 Rudolf Otto가 정의한 것인데 ‘성스러움’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바는 각기 다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이 조합은 뭔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상상력이 풍부한 자녀는 환상을 보고, 전도양양한 젊은이들을 꿈을 꾸고, 삶의 경험이 풍부한 늙은이들은 예언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배열을 했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 신비한 체험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넘어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 받은 이들을 일반인들이 보았을 때에는 술 취한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그들은 비록 술 취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방언은 지극히 정상적이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미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입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요,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이라는 ‘신비한 체험’을 ‘일상적인 삶의 형태’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삶의 패러다임이 변해야 합니다. 조금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말씀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시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받은 바 없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주신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구원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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