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간직한 신앙
에베소서 1: 3-10
■ 인간이 신이 되어버린 시대
<짜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니체는 ‘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니체는 현대 유럽 철학의 시조이자 서양철학의 거장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1844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기독교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자기 긍정성을 죽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고 강조하는 종교에 대한 반발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결국 1882년에 쓴 <즐거운 학문>이라는 저서에서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해자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 위로할 것인가?”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니체를 무신론자로 알고 있지만, “우리가 그를 죽였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어쩌면 유신론자들보다 더 종교적인 그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죽음의 시대를 넘어서 ‘인간이 신이다’라고 주장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인간이 신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을 수단화합니다. 입술로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의 주장과는 또 다른 천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시대의 풍조를 따라 거대화되어가고 맘몬화 되어가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 순교자의 길
저는 오늘 이 시대에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순교자의 길을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처럼 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는 일은 없지만, 제대로 하나님을 믿고 제대로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가려면 그 이상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자 하는 이들이 조롱당합니다. 가난한 이웃과 정의를 위해서 온몸을 바치는 이들이 비난받고,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물질적인 풍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을 향한 대형보수교회 목사들과 신도들의 비웃음과 비아냥, 대형교회를 이루지 못하면 마치 믿음도 적고, 능력도 없는 목회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이 신이 된 시대에서 목회자들도 어떻게 하면 큰 교회에 갈까 정치하고, 공부하려는 학위가 아닌 이력서에 낼 학위를 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가짜 학위가 판을 치고, 은수저 목사들은 대형교회를 세습 받습니다. 목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보다 크기를 자랑합니다. 큰 교회에 출석하면 자기의 믿음도 큰 줄로 착각합니다. 이런 시대에서 올바른 신앙을 견지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길을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한남교회는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길 원합니다.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한남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면, 그 안에 속해있는 여러분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이룬 교인들과 제직들과 당회원들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 비밀을 간직한 자
이런 교회를 만들어가려면 오늘 제목대로 ‘비밀을 간직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아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박해를 받아가며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누가 적인지 동지인지 구분하는 방편으로 ‘물고기’ 모양을 암호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물고기’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어부를 부르셨으며, 오병이어의 기적,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나타나 물고기를 잡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물고기를 드시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만의 암호로 ‘물고기’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암호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피지배자의 종교에서 지배자의 종교가 되자 물고기는 더는 암호일 필요가 없었기에, 물고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각인함으로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신앙에서의 ‘비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도 맨 처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유산 상속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종이나 어린아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면, 종은 종이고 어린아이는 주인이 됩니다. 마침내, 비밀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과 율법에 대한 비유로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에 있는 ‘메시아의 비밀’과 연결하면, 비밀은 영원히 감춰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면, 언젠가 우리 삶에서 그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 안셀무스 <모놀로기온-1077>
“조그마한 연못 안에 거대한 별이 들어있듯이 유한한 제정신 안에 무한한 당신이 계십니다.”
안셀무스는 자신이 믿는 신은 이성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위대하고, 너무 크고, 너무 높고, 너무 깊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니 신비라는 것입니다. ‘신비’는 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입니다. 그래서 ‘신의 비밀’입니다. 이 신비는 신의 다가옴과 동시에 인간의 다가감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방법, 그것을 안셀무스는 ‘이성’이라고 생각했기에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추구했고, 그런 작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종교 안에 머무르지 않고 종교 밖으로 나가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세속, 일상,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스며든 것입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신이 된 세상에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교회에 가둬두고, 우리가 필요할 때만 꺼내어 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말씀만!’입니다. 본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의 말씀만!”인데, 모든 영역에 스며든 하나님을 다 부정하고 교회 안에 갇힌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변질한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믿쑵니다!”가 판을 치고, 마치 신앙은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복음이 변질하는 것이지요. 변질한 복음, 그것은 더는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으니 아무리 열심을 내도 소경의 손을 잡고 멸망의 길로 갈 뿐입니다. 이것이 비밀을 간직하지 못한 신앙의 비극입니다.
■ 작은 이슬 안에 온 우주가
사진 몇 컷을 보시겠습니다. 이것은 포토샵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슬에 맺힌 상을 초 접사로 찍은 사진입니다. 성가대석에서는 화면은 작아도 거의 제가 본 것처럼 볼 수 있는데, 빔프로젝터를 통해서 보시는 분들은 희미하게 보이실 터이니 안타깝습니다. 이럴 때는 정면에도 대형 모니터 화면을 달고 싶기도 하지만, 최소한 100인치는 되어야 할 터이니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제주도 종달교회에서 목회할 때,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면 근처에 있는 지미봉이라는 오름을 올라가곤 했습니다. 어는 가을 억새잎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있는데 가만 바라보니 그 안에 종달리 앞바다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종달리 앞바다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들어있고, 성산일출봉, 우도 모두 들어있습니다. 작은 이슬방울방울마다 새겨진 작은 우주를 보면서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담고 싶어서 이년 정도는 이슬 사진을 연구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독학도 좋지만, 때론 이미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분에게 배우는 것이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서울생활이 시작된 이후로는 이슬 볼 일이 없어 이슬 사진을 거의 담지 못하지만, 그 작은 이슬 안에 온 우주가 맺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많은 신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저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슬에 담아두신 것이겠습니다. 제가 이슬을 묵상하면서 얻은 복음의 비밀은 이런 것입니다.
■ 5S(small, slow, simple, simplton, Serving(low))
작고, 느리고, 단순하고, 못 생기고, 섬김(낮음)입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삶의 방식이지만, 저는 이런 삶의 자세야말로 우리를 신비한 세계로 이끌어주는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큰 것만 좋아합니다. 큰 것의 끝은 ‘맘몬’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지금 가진 확실한 행복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쟁의 사회에서 남이 달리니까 목적도 없이 무작정 같이 달립니다. 마치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애벌레 같습니다. 남들이 올라가니까 자기도 벌레 기둥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올라가 보니 아무것도 없음을 압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수고가 허망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삶은 단순해져야 합니다. 단순하고 조촐해지면, 우리 내면에 있는 것들이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후배 목사가 지난 한 주간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SNS에 ‘길 위에서’라는 글을 연재했습니다. 평소에 글을 잘 쓰지 않던 목사였는데 신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이 제주도에 있을 때, 왜 그렇게 미친 듯이 글을 많아 썼는지 알겠어요. 삶이 간단해지니까, 내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겠어요.’
이런 경험은 저에게 홑꽃을 좋아하게 했고,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일에만 집중하는 생활습관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될까 재고, 까부는 것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한 치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요, 미래의 소관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내가 소관할 수 있는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못생긴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우리는 ‘동질성’을 요구당합니다. 이 동질성은 결국 <에로스의 종말>을 가져왔고, 타인, 즉 신에 대한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서구형 미남이 아닙니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서는 신도 인간의 관점에서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도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신은 죽었습니다. 결국, 못생긴 것을 본다는 것은 타자를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는 것이요, 신의 본질을 본다는 것과 통합니다. 그리하여 신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낮음입니다. 저는 세상의 가장 낮은 바다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저 바다의 끝과 맞닿은 수평선, 가장 낮은 곳인 바다로 모든 물이 모여들어 가장 넓은 물이 되는 신비와 가장 낮은 바다가 가장 높은 하늘과 맞닿아있는 현실. 거기에서 저는 땅과 하늘의 조화, 인간 사랑을 통한 하나님 사랑의 비밀을 체득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간직한 비밀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지난 27일, 우리는 역사에 기록될 큰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이 일이 디딤돌이 되어 평화로운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단된 역사는 우리 민족을 너무 가혹하게 괴롭혔습니다. 강대국들의 치킨게임에서 늘 희생양이 되었고, 분단된 것도 억울한데 좌우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원수처럼 대했습니다. 남한만 해도 진보와 보수가 마치 원수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인데, 긍정적으로 나아간다면 서울역에서 베를린행 기차를 타고 유럽여행을 하는 것이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중미일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다면, 이제는 우리 남북한이 상을 차려놓으면 그들이 서로 자기들도 나눠달라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북 교류가 과거의 동독과 서독처럼 이뤄진다면, 북한의 막대한 천연자원과 남한의 기술이 만나 풍요로운 나라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도 덴마크나 핀란드 같이 행복지수 상위권의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실패하면 우리의 역사는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며, 남북한은 서로 더 증오하게 될 것이며, 좌우의 대립,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더 악화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서 정전협정을 넘어 평화협정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시급한 시대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기를 기도하라’는 얼빠진 목사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자기들하고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좌파, 주사파 딱지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동북아 복음의 전진기지로 삼으시고자 이번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지만, 이미 이 비밀을 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이제, 그 비밀을 함께 간직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인간의 신이 되어버린 시대, 신이 죽어버린 시대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