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
요한1서 3:16-24 / 사도행전 4:5-12 / 요한복음 10:11-18
■ 부활절 넷째주일의 교회력
오늘은 부활절 넷째주일입니다.
교회력은 우리에게 오늘 읽은 요한1서의 말씀과 함께 사도행전 4장 5-12, 요한복음 10:11-18절의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며,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친 후, 대제사장들에게 잡혀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가 제자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고쳤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행 4:10, 12)
요한복음의 말씀은 ‘선한 목자’에 관한 말씀으로써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데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목숨을 버리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부이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세 본문은 구원 밖에 있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사랑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마땅하며, 그렇게 살아갈 때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요한1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그 사실을 통해(16)
‘목숨’은 최고의 가치 있는 것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증거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인의 마음처럼 미움과 살인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해시키시고 구원하셨습니다(롬 5:10, 빌 2:2-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2-8).”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꺼이 사랑해야 하고,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희생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16절에서 ‘마땅한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페이로멘’인데, ‘빚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는 것이 마땅한 일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의 관계라기보다는 ‘이웃’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웃은 사람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생태계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물론, 혈육관계에 있는 이들이나 사람을 소홀히 여겨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들은 당연히 포함됩니다. 형제사랑,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버리시며 베풀어주신 최고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 구체적인 형제사랑(17)
16절에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최고의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17절에서는 ‘일반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7절의 ‘세상의 재물’은 좁은 의미의 돈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삶의 기반이나 방법, 생활필수품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 2장 14-16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씀은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운 다음에야 어떤 조언도 의미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희생활 기회는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세상의 물질을 궁핍한 자들과 나눌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이런 기회들을 외면하고, 불쌍한 이웃을 보고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와주려는 마음을 닫고 싸늘한 태도를 보인다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그런 사람들의 마음 안에 깃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여러분 안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요한복음 10장 병행 본문 ‘선한 목자’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머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형제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증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 사랑은 실재적인 행동(18)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랑의 행동을 권고하면서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은 ‘텅 빈’ 말로 하지 말고 행함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언어가 아닙니다. 언제나 진실하고 실제적인 행동이 뒤따르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은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있는데, 행함이 역동적이라면, 진실함은 질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진실함으로’라는 단어‘엔 앙게테이아’는 종종 ‘진리’로 번역이 됩니다. 위선과 거짓은 언제나 나쁩니다. 그런데 사랑의 가면을 쓴 위선과 거짓은 더욱 가증스럽고 사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행동 없이 사랑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영혼 없는 사랑, 진실한 없는 사랑으로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집착을 사랑이라 하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참된 사람이 실종되었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결코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입니다. 여기서 ‘타자’는 ‘이웃’이며, 그 ‘이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이웃사랑 =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에로스가 종말을 고한 시대에서는 두 개인 혹은 이기적인 개인적인 사랑에 집착하면서 이웃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니 결국에는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행함이 없는 사랑, ‘텅 빈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한다고 착각하면서 사랑이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제적인 행동을 수반합니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 두려움 없는 사랑(19)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의 ‘이렇게 함으로써’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해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리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평안하고 침착하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20)입니다. 이 헬라어의 말씀을 쉽게 풀어보면 “우리가 기대하는 마음보다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실 마음이 더 크시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나,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 거짓말하는 자, 입으로만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전부 아신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 없는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 스스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확신을 하게 됩니다(21). 이런 확신을 하고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22). 진정한 사랑을 함으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면 막혔던 담이 허물어짐으로 자녀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처럼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진정한 형제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 하나님의 명령
23-24절의 말씀은 다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믿는 것’은 ‘피스테우스멘‘이라는 헬라어인데, 문법적으로 부정과거형입니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풀면, ’한번 믿으면 그 결과가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지속해서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가 행하신 일을 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행함 없이 ’믿는다‘는 말만 하면, 선민사상에 빠져,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므로 우리는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착각하다 폐망한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아가페멘‘인데, 문법적으로 현재형입니다. 계속 지금도 사랑해야 사랑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으라, 사랑하라!’ 그것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가 너희 안에 거하심을 증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
24절에서는 하나님과 성도가 서로 안에 머무는 관계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산다’는 것은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친밀한 교제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이러한 삶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를 드러내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와 이웃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을 믿는데 우리 삶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그리고 내 안에 계시는 증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