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으로 그린 구원/ 부활절 둘째주일 / 씨뿌림 주일
요한복음 20:19-29(행 4:32-35/요일 1:1-2:2)
지난 4월 3일, 씨크릿 가든(비밀 정원)을 정리하고 몇 종류의 상추 씨앗과 얼갈이배추와 무씨, 겨자씨를 뿌렸습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텃밭을 잘 가꿀 생각으로 흙을 고르고, 복합비료도 뿌리고 박찬흥 집사님이 가져오신 퇴비도 뿌린 후에 돌멩이를 골라내며 흙을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딱딱했던 땅에도 봄이 왔다고 뿌리지도 않은 이런저런 뿌리지 않은 씨앗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너무 작아서 무슨 씨앗인지는 모르겠으나, 잡초 외에도 지난해 뿌렸던 들깨와 상추의 새싹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써 자란 것들을 뒤집는 것이 미안했지만, 흙을 뒤집어도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자랄 것들은 자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돌이 많은 밭이었습니다. 돌을 골라내면서 다 골라내지는 못하겠지만, 골라내는 만큼 좋은 밭이 될 것이라는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에서 모든 죄악을 다 뿌리 뽑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뽑아내는 만큼 내 마음 밭도 좋은 밭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좋은 밭이 되다 보면 언젠가는 옥토가 되겠지요.
텃밭에는 질경이가 많이 올라왔습니다. 질경이의 뿌리가 엄청납니다. 지난해에는 그냥 잡초로 생각하고 씨름했는데, 질경이 효소로 만들면 항암효과에 탁월하다는 이야기에 효소를 담글 생각을 하고 질경이를 뽑으니 봄나물을 하는 기분입니다. 질경이를 하면서,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 필요없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풀도 그럴진대 사람은 어떨까 생각하니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씨앗을 뿌린 날 밤부터 새벽까지 봄비가 내렸습니다. 흙에 뿌려진 씨앗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기분이 다 좋습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다 보면 땅이 파이고 미쳐 물이 닿지 않은 곳이 생겨서 애써 평평하게 골라놓은 밭이 망가지기도 하고 씨앗이 드러나서 새들이 와서 싹이 나기 전에 집어먹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슬보슬 비가 내렸으니 밭은 밭대로 모양이 망가지지도 않았고 씨앗은 적당히 흙 속에 숨었습니다. 또 씨앗이 무르지 않을 정도로 하루 동안 날이 맑다가 다음날 밤부터 새벽까지 또 단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3:6).”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인간의 열심도 중요하겠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우리의 열심을 능가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 이 조화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모든 것은 자신이 하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사과가 있습니다. 이 사과를 나무에서 따서 깨끗하게 씻어 맛나게 먹으면서도 이 과정에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물을 줬다고 사과나무가 자라는 게 당연한가요? 여러분이 씹어서 삼켰다고 해서 그것이 소화되고 영양분으로 당연히 변하여야 하는 건가요? 우리는 사과를 심었고, 열매가 열리자 따서 먹었을 뿐, 그것을 자라게 하시고, 맛있게 하시고, 먹은 것이 소화되게 하고, 내 몸의 영양분으로 바꿔주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씨뿌림 주일을 앞두고 비밀 정원에서 흙을 만지며 묵상한 단편들입니다.
■ 부활절 둘째주일 교회력
오늘 말씀은 교회력에 따라 준비를 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과 서신서의 두 본문입니다.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주일 첫 번째 주일까지는 교회력에서 구약의 본문 대신 사도행전을 사용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본문은 사도행전 4장 32-35절과 요한일서 1:1-2:2절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 초대교회의 시작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면서 초대공동체 교회를 이룹니다. 그래서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 사도행전이 교회력의 본문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부활신앙이 나눔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곧 ‘사귐’을 전제로 했습니다. 성도들과의 사귐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으로 표현합니다. 죄인인 우리는 빛으로 나아갈수록 우리가 죄인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수록 어둠 속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의 실체가 그러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에 대해서 죄가 없다고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과정은 공동체 안에서의 사귐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과 요한일서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빛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이며, 빛으로 나아갈 때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어둠이 드러나지만, 이 인간의 어둠 때문에 십자가의 사랑과 보혈의 의미가 더욱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진에 대한 정의 중 하나가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말입니다. 빛이 있어야 사진의 미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빛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사진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둠이나 그늘이 없으면 빛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은 자신의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작가라면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빛 속에 있는 그늘과 어둠으로 사진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빛과 어둠, 그래서 컬러의 시대에서도 유명한 작가 중에서는 흑백사진만 담는 분도 있고, 카메라 중에서는 가장 비싼 카메라로 유명한 라이카에서는 흑백전용 디지털카메라를 만들어 보통의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보혈, 하나님의 존재가 의미가 있으려면 어둠의 존재인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지만 그것 때문에 절망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임을 자각하고 자기 안에 어둠이 있음을 인정하고, 공동체에 속한 이들과 사귐을 갖는 과정에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고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십자가 보혈이 작용하면서 구원(작품)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력에 따른 사도행전과 요한일서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16세기 이탈리아의 화단을 주름 잡았던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있습니다. 그는 정서불안과 우울증과 폭음,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잦은 싸움과 살인, 투옥과 탈출, 도망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로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럼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16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로 남습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1563년 로마가톨릭교회는 트렌드 공회에서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등장에 맞서는 방법의 하나로 성서 내용을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번역으로, 가톨릭은 성화로 성서의 내용을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 화가는 사회 상류층들만이 감상하고 이해하는 그림들을 그려왔는데 카라바조는 대중을 위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 중에서 포츠담 신궁전에서 소장 중인 ‘성 도마의 의심’이 있는데 요한복음 20장 24절을 소재로 하여 그린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지는 자가 도마(Thomas)를 그린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는 사람이 도마가 아니라 바로 나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그림입니다. 예수의 예언은 기적처럼 일어났습니다. 무덤에 묻힌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살아생전에 예언한 대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자기 손으로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8일이 지난 후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다시 나타난 예수는 의심 많은 도마를 향해 특별히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하여 믿지 않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 되어라.” 그러자 도마는 부끄러워하며 “나의 주, 나의 신이시여”라고 대답합니다. 1945년 도마복음서가 발견되면서 밝혀진 바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예수님의 복심을 가장 잘 이해한 제자가 도마였습니다.
■ 풍크툼(Punctum)과 스투디움(Studium)
사진 이론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는 풍그툼과 스투디움이라는 철학적인 개념이 등장합니다. 사진을 감상할 때 별도의 복잡한 개념이나 철학이 필요한 게 아니고, 셀카 보듯 풍경 사진 보듯 음식 사진 보듯 그냥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스투디움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사진을 읽는 것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객관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문화적 코드를 읽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사진 감상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춰야 하지만, 스투디움의 한계는 구경꾼이 머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의 개념인 풍크툼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으로 사진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폐부까지 확 다가오는 강렬한 자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풍크툼(Punctum)은 라틴어로 뾰족한 도구에 의해 상처 난 상흔을 가리킵니다. 화살촉처럼 아주 날카로운 것이 어느 부위를 찔러 상처를 입히는 아픔이지요. 아주 작은 세부가 느닷없이 날아와 그것에 찔려 상처 입은 흔적이 풍크툼입니다. 진중권은 ‘일반적인 해석과 관계없이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를 푼크툼이라 정의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과 연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예수님의 상흔을 일반적인 해석에 틀에 따라서 이해하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거기에 어느 정도의 신학적인 지식을 가미하고, 객관화시키면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풍크툼은 ‘새겨진 상흔’이라는 뜻으로 관찰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본 경험은 스투디움이 아니라 풍크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상흔을 보고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스투디움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상흔은 곧 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상흔을 새기는 것이 풍크툼인 것입니다. 스투디움에 머무는 신앙은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는 신앙이 되려면 스투디움의 신앙에서 풍크툼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조건 “믿습니다!”만 강조만 한국의 기독교는 신앙을 스투디움에 머물게 하면서 조롱거리가 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류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투디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나 자신을 연결하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스투디움에서 풍크툼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 빛과 어둠으로 그린 구원
앞에서 사진은 빛과 어둠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추는 구원의 빛과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어쩔 수 없는 어둠, 이 둘이 만나 ‘구원’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른 병행 본문 요한일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둠에 행하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하지만, 아무리 힘써도 우리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빛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빛과 인간에 내재한 어둠이 만나 구원의 역사라는 위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줍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관에 기웃거리지 말고, 우리가 소관할 수 있는 것에 열중하면 됩니다. 이것이 씨뿌림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은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이 어둠을 온전히 몰아낼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합니다. 영원하신 빛이신 하나님께서 어둠에 빛을 비추시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요, 부활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에 익숙해지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인간이 빠져있다면, 그 구원의 역사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시는 데에는 우리 어두운 인간, 죄로 물든 인간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는 말씀을 통해서 빛과 어둠으로 그리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완연한 봄입니다.
봄 햇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여러분의 마음마다 스며들어 구원의 역사가 쓰이는 새 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