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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루살렘아!(2018 종려 주일)

  • 관리자
  • 2018-03-25 0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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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루살렘아!(2018 종려 주일)
사무엘하 5:6-10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한 데서 기원한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가시고, 며칠 뒷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은 가히 파격적이었으며,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이단아로 로마 제국에게는 유대의 독립을 획책하는 정치범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과 관련하여 기독교 역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첫 번째로 행하신 성전숙청 이야기를 통해서 ‘종려주일’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

 

2세기 중반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문학 집대성>을 통해 천동설을 체계화했고,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동설이 발표되었고, 1632년 갈릴레오의 <두 개의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가 출간되어 지동설이 입증되었으니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류가 알게 된 것은 아직 40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천동설이 체계화된 이후 1,400년 가까운 시간,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지동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마녀사냥을 당했습니다. 만약 지동설을 인정한다면, 소박한 우주관에 입각한 성경의 가르침이 뒤집히며, 나가서 교회의 권위가 뒤흔들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원전에 살았던 이들 중에서 우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곧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랍비들은 당연히 예루살렘을 우주의 중심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뤘던 다윗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0세기 무렵에 여부스인이 살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도 옮겨왔고, 아들 솔로몬이 세우게 될 성전의 기초를 닦아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전성기를 예루살렘에서 누렸던 것입니다.

기원전 957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은 587년 유다왕국이 바빌론의 손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400년간 이스라엘의 중심축이었습니다.

587년 바빌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관용정책으로 스룹 바벨 시대에 재건되었습니다. 물론,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규모였습니다. 이 성전을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도 알렉산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 당했고, 알렉산드리아 제국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사분되었습니다. 그때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4세는 제2성전 안에 신상을 세워 유대인들에게 모욕감을 줍니다. 이때,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이 마카베오 혁명을 일으켜 제2성전이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혁명의 성공으로 하스모니아(하스몬) 왕조가 수립되었지만, 내부 분열로 곧 자멸하고, 로마의 지원을 받은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 즉 에돔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으로 오래전에 갈라진 민족이라 유대인들과는 다른 민족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메꾸기 위해 제2성전을 증축합니다. 이것이 ‘헤로데 성전’이며, 예수님의 성전 정화가 펼쳐진 무대이기도 합니다. 헤로데 성전은 유대 전쟁 당시 티투스 장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파괴되어 이후 두 번 다시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그때가 70년이었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겪으신 후 37년 뒤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 이후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안식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입니다. 이후,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는 이슬람의 바위의 돔이 지어졌으며, 성전의 뜰 자리에는 알 악사 모스크가 지어졌고, 통곡의 벽만이 유대교 성전의 잔해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 두 행렬

 

예루살렘은 이런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순례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행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마태복음 21장에 의하면 그때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며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십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에 얹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는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폅니다. 이 행위는 메시아를 환영하는 의례입니다.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호하며 예수 일행을 반깁니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로 시편 118편 25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성이 소동했다고 말합니다. ‘소동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지진을 일으키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기존 질서에 어떤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음, 즉, 기존 질서의 바탕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또 하나의 행렬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수많은 순례자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고, 오랫동안 이방 민족의 압제 속에서 나라를 잃고 살아가던 이들의 울분이 고조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언제든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고, 총독은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로 예루살렘으로 이동시켰을 것입니다. 이동을 시킬 때에는 깃발을 앞세우고 기마병들은 위풍당당하게 무력시위를 하듯 행진하며 ‘반란은 꿈도 꾸지 마라!’ 암시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의 행렬은 로마의 무력시위에 대한 조롱 혹은 무력과 폭력에 바탕한 통치 행위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말이 전쟁을 상징한다면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말은 상징적으로 ‘힘의 논리’를 상징한다면, 나귀 새끼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뤄가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의 논리’로 만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서로 섬기는 겸손’으로 만들어가실 것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 성전 숙청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로움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 그 안에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들러 엎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십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은 단순히 성전에서 벌어지는 상행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명목으로 제사장과 상인들 사이에 이뤄진 탐욕의 밀약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을 빙자하여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던 제도화된 종교와 종교인들은 넉넉한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특권의식에 길들어서 성전의 본질을 포기해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분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의한 일을 보아도 분노할 줄 모르고,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데도 분노할 줄 모릅니다. 거룩한 분노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으로 나오는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을 다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몸이 성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었으며, 죄인 취급 당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숙청을 하신 후, 죄인 취급 받던 병자 중에서도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치신 것은 우연한 산물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하 5장 8절의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죽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기의 명예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하여 누군가를 죽여야 했지만, 예수님은 맹인과 다리 저는 자를 회복시키심으로 죽이는 자가 아니라 회복시키는 자로 오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 일을 본 아이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외쳤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외칩니다(마 21:15).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노기 띤 음성으로 그들을 꾸짖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 8편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고는 베다니로 물러가십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숙청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와 구원의 성취를 동시에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성취는 힘의 논리가 아닌, 섬기고 서로 돌보는 일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을 상징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은 예수님으로서는 고난의 시작이고, 제자들과 이스라엘로서는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에 대한 포기의 시간이고, 종교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입시키면 교회 본질에 관한 이야기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에 관한 이야깁니다. 종려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남교회에 오시어 “아, 한남교회여!” 하실 때 그것이 한탄의 소리일지, 감탄의 소리일지 우리는 돌아봐야 합니다. 저는 우리 한남교회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서로 섬기는 겸손’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의 논리로 이뤄지는 나라가 아니라 섬김의 행위로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서로서로 섬기는 겸손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최고의 덕목은 섬김입니다. 한남교회가 섬기는 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은 한남교회를 보시며 “아, 한남교회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둘째, 거룩한 분노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교계와 교회와 성직자와 신도들에 대해서 너무도 관대합니다. 이런저런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제 자식 껴안기 식으로 무조건 감쌉니다. 분노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손가락질합니다.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만 거룩한 분노를 상실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힘없는 자들이,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들이 강자와 다수에 의해 괴롭힘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의한 자들을 지지합니다. 교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를 회복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보면 예수님처럼 뒤엎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대하여 분노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한남교회를 보시며 “아, 한남교회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셋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습니다만, 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잘 드리면, 삶으로 드리는 예배도 잘 드리게 됩니다. 형식이 빠진 내용은 공허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잘 드리면 예배자들이 복을 받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시는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집중하는 만큼 하나님도 예배자의 삶에 집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많은 교회가 예배를 간소화합니다. 어떤 교회는 신앙고백도 없고, 회개의 기도도 없고, 용서의 선언도 없습니다. 찬양과 말씀과 헌금에만 치중합니다. 교회는 광야와도 같은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의 영을 회복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회복할 때 하나님은 한남교회를 보시며 “아, 한남교회여!” 감탄하실 것입니다.

 

■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려 주일을 보내고 나면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광야가 있었듯이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습니다. 올해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시간에 하루 한 장씩 읽던 성경 말씀을 잠시 쉬고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주제로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며 부활절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저망한 성경학자이자 열정적인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의 사순절 묵상을 기초로 하여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매일 참석하시는 것이 힘들다면 하루라도 큰 맘 먹고 참여하셔서, 하루의 시작을 주님께 예배드리며 시작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힘드시거나 차량으로 이동해야만 하시는 분들은 오늘 나눠 드린 <고난주간 묵상집>을 묵상하시고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변화가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부활주일에 주님께서 새로운 심령으로 거듭난 여러분의 부활을 보고 기뻐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거둠기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그 길은 나를 회복시켜주시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믿음의 현재성을 회복하게 하시고, 우리 한남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고난이 부활로 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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