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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YES(사순절 다섯째 주일/출애굽기 17:1-7)

  • 관리자
  • 2018-03-18 0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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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YES(사순절 다섯째 주일)
출애굽기 17:1-7

 

지난 주간에는 이런 생각에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예수님은 차가운 겨울 같은 세상에 불어온 봄바람 같은 분이셨습니다. 따스한 바람으로 얼음장 같았던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뿐, 그와 동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소리는 요란한데, 십자가의 길은 한가하기만 합니다. 외롭게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그래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목사인 저도 동행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외로운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전히 광야와도 같은 길을 외롭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출애굽기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애굽으로부터의 해방(1:1-15:21),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 광야생활(15:22-18:27), 시내산 체험(19:1-40:38)으로 나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두 번째 부분으로 ‘광야생활’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광야라는 장소는 사순절을 보내기에 참으로 적절한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사순절은 모든 것이 결핍되고 척박한 곳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살아보는 시간이며,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믿음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 광야의 시간

 

출애굽과 관련하여 물과 관련된 이적은 일곱 가지인데, 물이 피가 되는 기적(7:20-25),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14:21-22), 홍해가 다시 합쳐지면서 적들을 삼키는 기적(14:26-29),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기적(15:22-26), 바위에서 물이 솟는 기적(17:5-7), 물이 다시 바위에서 솟는 기적(민 20:7-13), 요단 강이 마르는 기적(수 3:14-4:24)이 그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출애굽공동체는 수르 광야로 접어들었습니다.

광야는 단순히 지리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는 신학적으로도 우주적으로도 혼돈의 상태입니다. 광야는 척박한 곳이요,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 이유는 물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장정만 육십만 명이 넘는 대규모 이동이었으니, 서로 의지가 되기도 했겠지만, 인간생존의 기본인 의식주의 문제를 광야에서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의식주의 문제 중에서 인간을 가장 밑바닥까지 끓어내리는 것은 ‘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먹는 문제 중에서도 ‘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는 40일 이상도 견디지만, 물이 없으면 견디지 못한다고 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수르 광야로 접어들어 사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길을 걷는 동안 그들을 두렵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이들은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마라(쓰다)에 이르렀을 때 물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물은 ‘마라’하는 뜻이 암시하듯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은 또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제 목말라서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 부닥쳤으니 모세를 원망할 만도 합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죽음의 땅 광야를 생명의 땅으로!

 

마라의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쓴 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는 도구로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쓴 물을 단물로 바꿀 그 신비한 나무는 어디에 있던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마라(쓴 물) 곁에 있는 나무였습니다. 그 신비한 나무는 먼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었으며,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의 일상에서 늘 대하는 평범한 것들이 귀하게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광야의 결론은 이스라엘이 심각한 어려움의 시절에 보여주신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광야의 시간을 살아갈 때에도 그 끝에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이 확증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삶이 광야와도 같고, 힘드십니까? 하나님은 광야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꾸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특별하고, 비범하고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능력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보통의 것들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 마라, 엘림, 맛사(므리바)의 시간

 

그들이 마라에서 물을 마신 뒤에 그리 멀지 않은 엘림이라는 곳에 이릅니다. 거기에는 물 샘 열둘이 있고, 종려나무도 일흔 그루나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마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마라에 있다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쓴 물은 곧 단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엘림에 있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라의 시간이 곧 또다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며 삶입니다.

마라의 시간과 엘림의 시간은 우리에게 교차하며 다가옵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삶의 계기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라의 시간을 보낼 때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엘림의 시간을 보낼 때에는 감사함으로 받으며 엘림의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엘림의 시간에는 언제든지 마라의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는 겸손함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마라의 시간에는 엘림의 시간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시간과 엘림의 시간 모두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라와 같은 절실한 상황 속에서, 맛사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자신들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아무런 대안이 없음을 알고 난 뒤에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어 생명수를 주셨고, 반석에서 샘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이 생명수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이렇게 자신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야훼께서 우리 중에 계십니다.”

 

‘마라의 시간’을 살아갈 때에는 ‘쉴만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마라의 시간과 엘림의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은 또다시 맛사(또는 므리바)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십니까?” 질문합니다. 그때 야훼 하나님은 쥐어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이스라엘 중에 계심을 확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십니까, 아닙니까?”라고 질문할 때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내가 너희 중에 있다”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곳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중에 계심을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라의 시간과 엘림의 시간, 맛사 므리바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입니다.

 

■ “맞습니다. 야훼께서 우리 중에 계십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7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과 다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세가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까지 처했지만, 하나님께서 쥐어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반석에서까지도 물을 주셔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감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과도 같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는 진술을 자주 봅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 십자가 고난의 순간과 죽음을 보면서 많은 이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맛사 므리바에서 물 문제를 두고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너무도 절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직면한 이스라엘, 그러나 그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제자들도, 예수님의 어머니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불안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하는 질문에 대해 뭐라고 응답을 했겠습니까?

 

“맞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중에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무덤에 있는 시간 동안 그를 따르던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서 새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맞습니다. 우리 중에 계셨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광야의 시간, 마라의 시간, 맛사 므리바의 시간, 절망의 시간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게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광야의 결론이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의 확증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겪는 아픔의 시간은 결국 야훼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의 확증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절망과 아픔 가운데 있는 이유는 아직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위대한 YES!

 

하나님은 광야를 생명의 땅으로 바꾸실 능력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yes!
오늘은 “아멘!” 보다 yes라고 해볼까요? “oh yes!”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맞습니까? yes!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불안한 상황을 생명으로 채우시는 근원이십니다. 맞습니까? yes!
하나님은 막막한 세상에서도 안녕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맞습니까? yes!
하나님의 능력은 말로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까? yes!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도 Yes, 마라에서도 Yes, 엘림에서도 yes, 반석에서도 Yes, 사순절에도 Yes, 목마름에도 Yes, 세상을 향해서도 Yes, 모든 설명을 넘어서 Yes...!

불의한 일이 아니라면, no하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yes!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십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위대한 YES!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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