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창세기 13:14-18
■ 길 위에 서 있는 이스라엘 역사
창세기 12장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느닷없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음에도 ‘네게 보여줄 땅’이 어디인 줄도 모르면서 모든 소유와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길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길 위를 떠도는 아브라함에게 헤브론으로 옮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헤브론 땅을 종행으로 두루 다녀보라고 하시며, 두루 다니며 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헤브론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며 유대교에서는 예루살렘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성지이고 4대 성지 (예루살렘/헤브론/제파트/티베리아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이곳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고보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막벨라 동굴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아주 오랜 뒤에 이뤄지고, 이뤄진 후 지금까지도 분쟁지역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유보되면서, 요셉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모든 가족을 애굽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창 46:3).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다가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여 광야로 나가 40년 동안 광야를 걷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가히 ‘길 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 (슬픔의 길)
사순 절기에 오늘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내가 걷는 길에 대해 묵상하면서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읽었습니다.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P. 237).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위에 서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걸으셨던 ‘길’을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 – 슬픔의 길)’라고 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십자가 수난의 길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까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길은 재판정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이지만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이 길을 14처로 구분하여 묵상하며 매년 사순절이면 이곳을 순례하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걷는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이 걸으셨던 발자국을 밟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걸으며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고난의 길, 순종의 길, 생명의 길을 자신들도 걸어가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를 직접 걷지 못할지라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을 어떤 분은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동행하니 기쁜 길이지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은 탐욕과 거짓과 온갖 불의가 만연하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샬롬(shalom)’이 충만한 평화로운 길이 아니라, 샬롬이 없는 곳입니다. 온갖 탐욕과 거짓과 불의가 판을 쳐서 평화가 실종된 그 길을 걸어가면서 어둠의 그림자를 몰아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이요, 아픔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지만, 기쁨의 길이요, 치유의 길이요, 생명부활의 길이 된 것입니다.
■ 성경이 증언하는 ‘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고향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에, 그들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새로운 땅으로 약속을 믿고 떠납니다. 안전하고 익숙하던 곳에서 떠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곳에서 떠나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샬롬(shalom)’이 충만한 곳이 아니라, 평화가 실종된 곳입니다.
오늘날 평화가 실종된 곳은 어디입니까?
멀리 갈 것 없습니다. 평화의 개념을 너무 크게 생각하면, 우리 안에 이뤄야 할 작은 평화들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평화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서 세계 평화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가야야 길은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길’입니다. 제대로 길을 걸어가고자 하신다면, 먼저 내가 지금 서 있는 길이 어딘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이 아름다운 길이요, 의미 있는 길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이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이웃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에 하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돌리소서!”입니다. 만일, 예수님 개인만 생각했다면, 거기서 멈췄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련으로 가득한 위험한 길을 걸어가기로 합니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길은 ‘고난의 길과 순종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기꺼이 걷고자 할 때 ‘생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 믿는 것과 걷는 것 περιπατέω(페리파테오)
헬라어 ‘페리파테오’는 ‘걷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할라크’도 ‘걷다’라는 뜻인데 개역성경에서 ‘동행’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출애굽기 34장 9절에서 모세가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간청할 때 모두 ‘할라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믿다’라는 뜻을 대신 사용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믿는 것 = 걷는 것’이고, 초대교회가 형성된 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묵상하며 길을 걷는 이들을 ‘순례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로마와 예루살렘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3개 순례의 길 중 하나인 산티아고는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죄를 없애준다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종교적인 목적보다 개인적인 동기나 자기 성찰과 여행을 목적으로 찾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걷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내면의 깊은 성찰에 이를 수 있기에 수많은 지혜자가 ‘걷기 예찬’을 하는 것입니다.
■ 길 위에서
우리가 서 있는 길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예수님만큼 못 간다고 해도, 좀 느리게 간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가시지 않고 우리와 보폭을 맞춰주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길 위에 서 있느냐?”입니다. 잘못된 길에 서서 제아무리 열심히 걸어봐야 사망의 길일 뿐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길이 생명의 길이라면, 천천히 가도 빨리 가도 좋은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다비드 르 브로통의 <걷기 예찬>에 나오는 글을 인용했습니다. ‘걷는 행위’를 통해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는 말은 지극히 성경에서 말하는 진실에 맞닿아있습니다. 오랫동안 먼 길을 걸어가려면 가벼워야 합니다. 걷는 일이 일상화되면, 즉 우리의 믿음생활이 일상화되면 우리 삶을 힘겹게 하는 군더더기 같은 짐들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걷기 전에는 불안과 탐심과 유혹의 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걸어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쓸모없는 짐인 줄을 알게 됩니다. 그런 각성에 이르면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짐을 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1장 30절에 나오는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풀꽃도 만나고 때로는 원하지 않는 날씨도 만나고, 때론 강도 만난 이웃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길이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길이라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 신앙의 근력을 키우라
지난 주간에는 어떤 젊은 철학자가 주는 인생지침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운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를 살아갈 것이고, 지금 이 말을 듣는 대부분 사람은 100살 넘게까지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길고 화려한 삶을 우울하지 않게 살려면 운동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당신보다 약자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가장 힘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당신을 평가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단지 처세술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신앙지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생활도 운동이 필요합니다. 근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그 길을 걸으십시오. 숨 가쁘지 않게 천천히 걸어도 됩니다. 지속해서 규칙적으로 걸으십시오. 그것이 신앙의 근력을 튼튼하게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배려하는 것이요,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만큼 하나님도 당신을 존중해 주실 것입니다.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ME TOO 운동’은 강자들의 폭력성이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어떻게 광범위하게 일어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가해자나 암묵적으로 ‘그게 우리네 문화였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런 운동을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참에 성폭력의 문제에서의 #ME TOO만이 아니라, 온갖 강압에 의한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ME TOO 운동이 전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라고 하시는 그 길 위에 서 있는 여러분,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 여러분보다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또한 신앙이 근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깊게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길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배이든 노예적인 습관과 온갖 불의한 것들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게 할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시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 함께 큰 기쁨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