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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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선 시선(사순절 둘째주일/가복음 7:24-30)

  • 관리자
  • 2018-02-25 0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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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선 시선(사순절 둘째주일)
마가복음 7:24-30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사는 덕분에 ‘만물의 소생’이라는 뜻을 가진 사순절(Lent)을 보내는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을 통해 사순절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봄’을 보셨습니까?

남도는 물론이고, 경기 북부와 강원도에서도 봄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광릉수목원 노지에는 나무 꽃 풍년화가 피었고, 풀꽃들도 앞을 다투며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이 되면 풀꽃뿐 아니라 겨울잠을 자던 동물도 슬슬 깨어나고, 곤충도 활동합니다. 저는 목양실에서 번데기에서 변태한 곤충을 만났습니다. 지난겨울 너무 추워서 얼어 죽지 말라고 화분을 좀 많이 갖다 놓았는데, 어떤 화분에 곤충이 낳았던 알이 있었나 봅니다. 화분 속에서 유충이 되었을 터이고, 유충은 번데기가 되었다가 비로소 올봄에 변태하여 하늘을 나는 곤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곤충이 ‘초파리’라는 것이 아쉽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봄이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 ‘말똥구리’와 ‘여의주’ 이야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선귤당농소> -‘선귤당에서 크게 웃는다’- 에는 ‘말똥구리와 여의주’라는 글이 있습니다. 몇 문장으로 혹은 한 문장으로 이뤄진 글을 ‘소품문’이라고 하는데 전문은 이렇습니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선귤당농소-‘말똥구리와 여의주’ 전문>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필요없는 물건입니다. 그리고 용도 말똥구리에게는 자신의 여의주만큼 말똥구리에게는 말똥이 귀하다는 것을 압니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우주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동물이고, 말똥구리는 똥이나 굴리고 먹고사는 가장 미천하게 여겨지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이덕무의 글에서는 이 경계가 의미가 없습니다. 용과 말똥구리는 동등하고, 여의주와 말똥의 가치도 동등합니다.

 

■ 십자가의 도

 

예수님은 ‘말똥구리’처럼 미천하게 여겨지던 이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모두 ‘존귀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자신들만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신들을 용처럼 생각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차별 때문에 스스로 구원밖에 있다고 생각하며 죄의식에 빠져서 살아가던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자신들은 죄인들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 살았던 ‘바리새인(구별되었다는 뜻)’, 그들과 다를 바 없지만,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과 이 두 지파에 속해있으며 선민사상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은 “당신들이 죄인이라 규정했던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을 받는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던 것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급기야는 “독사의 새끼들아!” 저주까지 퍼붓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예수님이 눈엣가시 같았을 것이고, 그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지금껏 누리는 모든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길이 십자가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 길이 아니고서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아셨기에 속죄양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구원밖에 있다고 여겨졌던 이방인들과 죄인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죽인 자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은 열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의미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나를 넘어선 시선 1 - 전통을 넘어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잘 알고 계신 말씀입니다. 지난해 4월 오후 예배 때에 박준호 전도사님이 ‘수로보니게 여인 vs 만화가 박홍용’이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인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저도 이전에 ‘개가 된들 어떠리?’라는 제목으로 이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주로, 이방 여인의 믿음에 초점을 맞춘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순 절기에 예수님의 여정을 더듬어가며 사순절 묵상을 하는 중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이방 여인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알고 교제하던 사람들을 넘어서고, 자신이 알고 실천하던 계명을 넘어서고,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을 넘어서 알지 못하는 세계로 다가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의 간청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을 예수님의 스승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을 만나기 전 예수님의 소명의식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욕적인 예수님의 언사에도 거듭되는 이방 여인의 간청 덕분에,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자신의 소명과 위임을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영역과 전통을 넘어서 타인에게로 이방인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온전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 이후,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는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전통적인 가치들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가부장적인 문화와 계급, 군대문화 등 남성 중심적인 전통은 많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최근 문화예술계를 시작으로 #Me too 운동이 활발합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사회도 남성의 시선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로서의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길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용기있는 이들의 불의를 향한 고발, 그것을 통해서 말로는 양성평등을 이야기하지만, 내용에는 남성 중심적인 우리 기독교도 교회의 소명과 위임을 다시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 나를 넘어선 시선 2 - 경계를 넘어서

 

우리는 ‘타인’과 적당한 경계를 두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타인’이라 함은 단지 우리가 통성명하지 않은 알지 못하는 익명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자’보다는 조금 범위를 좁혀서 ‘사람’에 국한했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고 더 나아가서는 종교가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소원을 이뤄주신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런 경계들을 넘어서야 함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치유와 복음이 우리와 비슷한 사람 혹은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가 구원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던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면 경계를 합니다. 경계를 정해놓고 넘어가면 큰일 날것처럼 가르칩니다. 경계 너머에 있는 이들을 적대하고 증오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까닭에 경계 너머에 있는 이들을 증오하는데 아주 익숙합니다. 1945년 해방된 이후, 우리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한 결과 70년 가까이 분단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 겨레가 하나 되어 3.1 독립운동 99주년을 맞이하지만, 우리는 진정 독립 국가인지 의심해야만 하는 지경입니다.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보셨듯이 남과 북은 이념과 이데올로기라는 경계를 넘어 하나 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대립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려면, 이데올로기라는 경계를 피차가 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경계를 지으려는 이들이 있고, 그 경계가 무너지면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평화통일을 꿈꾸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단의 문제 말고도, 다양한 이슈로 갈등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이 되지 않아서, ‘내 생각하고 다르면 틀리다’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적’으로 여기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대응합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방면에서 경계를 무너뜨리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며 화합해 가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분열과 경계를 짓고 편 가르기 하는 곳에서 경계를 넘어가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 우리를 부르시는 곳

 

28절에 “여자여, 제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바로 이 자리, 치유의 자리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치유의 자리로 부르실 뿐 아니라, 나눔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이웃이며, 나그네의 이웃이며, 고아와 과부들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 모두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치유될 때, 우리도 비로소 온전히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시선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말똥구리의 말똥과 용의 여의주의 가치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복음 안에 있는 자들과 복음 밖에 있는 자들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들을 경멸하고 저주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넘어선 시선’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눈을 뜨는 것이 필요합니다. 맑은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눈뜸의 기적이겠지요. 맑은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만물을 바라보십시오. 로마서 1장 19-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거룩한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무슨 말씀일까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모두 보여주셨기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라고 핑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경계를 짓고,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물 안에서 보는 하늘 이상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우물 밖 하늘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을 오히려 박해합니다.

 

봄입니다.

봄은 ‘보다’의 명사형인데, 봄은 보려고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이 보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나를 넘어선 시선’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진일보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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