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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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성령의 빛(고린도전서 3:16~17)

  • 관리자
  • 2019-08-25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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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마지막 주일
내 안에 있는 성령의 빛
고린도전서 3:16~17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에덴의 동쪽’이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죄악을 범한 이후, 인간은 다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과 같은 흑암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본질에 있어서 ‘흑암’ 즉 ‘어둠’을 향해서 가는 세상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빛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름의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별나게 빛나는 유명 씨도 있고, 이름 없이 빛난 삶을 살았던 무명씨도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안에 성령의 빛’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입니다. 그러므로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성령의 빛 덕분에 빛나는 존재요,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에덴의 동쪽은 어둠을 향해서 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거스르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 본향을 향하여 가는 존재 – 인간

원죄론이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의 이해는 갓 태어난 아이도 아담과 하와의 죄, 부모의 죄의 DNA가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시대에는 태어나서 바로 죽은 아이가 천국에 갈까, 지옥에 갈까 하는 신학적인 논쟁도 있었습니다. 이런 논쟁은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에 근거한 이들이나 이원론자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에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의 결론은 내려진 것 같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주어지는 것이요,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인데 ‘갓 태어난 아이’는 십자가를 알지 못하므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동의하시는지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도 아닌 조상의 죄를 물어 아기를 지옥으로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 우리는 본래 ‘죄를 품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의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맨 처음의 인간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내까지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귀한 존재였으며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새 생명으로 인도하신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제는 네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라(갈 2:20)”는 귀한 신앙고백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본 모습은 ‘원죄에 빠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존재,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 빛나는 존재가 현재는 ‘에덴의 동쪽’으로 추락했지만, 에덴의 동쪽에 머물고자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본향을 향하여 가는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아주 좋은 그 어떤 것(하나님의 계획)에 ‘동참’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의 실패는 원죄를 만들어내고 끝난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 이끌어준 사건이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 위쪽으로 떨어지다.

리처드 로어의 <Falling Upward –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오직 추락해본 사람만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표제로 시작합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을 제가 이해한 말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떨어진다’고 하면 중력작용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삶, 영혼은 <그래비티>라는 영화에서처럼 중력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떨어짐’을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데, 그런 경우 ‘위쪽으로 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데 ‘후반부의 인생’은 우리가 떨어지는 이유는 위쪽을 향해서 가는 여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후반부 인생을 살지 못하고, 후반부 인생을 준비하는 전반부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다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죠. 리처드 로어는 영혼에는 많은 비밀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르막길이 곧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면 거꾸로 내리막길이 오르막길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패턴으로 인류의 역사와 문학작품, 전설, 신화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짐으로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사람들이 이 ‘상실과 회복’의 패턴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리막길에 서 있던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감을 증명하는 경전입니다. 오르막길에 서 있는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은 ‘전반부 인생’일뿐 ‘후반부 인생’을 살아가라고 권면하는 경전입니다.

이러한 예는 실패했던 탕자, 의심 많았던 도마, 예수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바울,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를 범했던 다윗, 간음한 여인 마리아, 가난하고 낮은 자들, 병자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리처드 로어는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을 통해서 내리막길이 끝이 아님을 밝히고, 오르막길도 끝이 아님을 밝히면서 삶에서 실패와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가 있지만, 빛의 자녀들, 성령의 빛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 내리막길을 통해서도 엄청난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지기는 떨어졌는데, 위쪽으로 떨어졌다는 재미있는 책 제목이 지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살다 보면 실패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가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야 할 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하나님을 가장 강력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시고 용기를 내십시오.

 

■ 넘어가는 신비(the passing over mystery)


넘어간다는 말은 히브리어 ‘페사크’에 어원을 둔 ‘파스카’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넘어가는 신비’를 ‘파스카의 신비’라고도 합니다. 파스카가 무엇입니까? ‘유월절’입니다. ‘담을 넘었다’는 뜻이지요. 노예로 저 밑바닥에서 살아가며 아우성치던 히브리인들, 내리막길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던 이들이 ‘파스카의 신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내리막길’을 통해서 ‘위로 올라가는 신비’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만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무엇임을 이해합니다. 아래로 떨어진, 그것도 잘 떨어진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위’를 오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양 그리스도교와 서양 식민지였던 곳에서 일반화된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내리막길, 실패를 하나님의 저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는 성장만 강조해 왔습니다. 실패는 저주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출애굽한 이후 광야로 인도하는 모세보다 당장의 안위를 채워주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드는 아론을 추종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번영신학에 취해 불행하게도 오늘날 성직자 중 많은 이들이 모세가 되기보다는 아론이 되기를 원하고, 그것이 성직자의 사명인 듯 착각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가는 신비를 배워야 합니다.

넘어가기 위해서는 실패를 내리막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껏 신봉하고 있던 가치관들을 내려놓고,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만 열심을 내었지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계기로 만들진 못했습니다.
 

완전치 못하고 추락하는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품어 안으십시오.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야 그것을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 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성령의 빛’이 반드시 우리를 일어서게 하실 것이며,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혹시,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겸손하여지기 바랍니다. 내리막길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고, 그 오르막길에 오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수많은 그림자노동이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그림자 노동 & 그림자 복싱


그림자 노동에 대해서는 일전에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입니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그림자 노동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림자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천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외국인노동자들, 심지어는 자연생태계의 모든 그림자 노동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성령의 빛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정리하면서 ‘그림자 복싱’이라는 단어를 하나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그림자복싱’이란 ‘내면의 싸움’입니다. 일반적인 정신적인 ‘갈등’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기 위한 내면의 싸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전에 ‘힘들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 힘들게 하는 것과 싸우는 것, 싸우되 기쁜 마음으로, 승리할 것을 확신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이지만 처참하거나 비참하거나 잔인하지 않고 아름다운 싸움입니다.

 

우리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 자아’를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기독교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참 자아는 ‘벌레만도 못한 죽을죄인’이 아니라 ‘성령의 빛을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 빛을 품고 ‘본향’을 향해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후반부 인생은 시작됩니다. 그 후반부인생이 손짓할 때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림자복싱’입니다. 후반부인생은 육체적인 나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에서 후반부 인생의 의미를 축약하고 있는 문장을 하나 소개해 드리고 말씀을 마칩니다.
 

“더 이상 그것을 ‘저기, 바깥’에서 찾지 않고 ‘여기, 안’에서 찾는다. 안과 밖이 하나로 되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셨는데 우리는 밖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늘 밖에 있으므로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강림절 마지막 주일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하나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거룩하게 지켜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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