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시편 34:15~20
여러분이 기도해 주신 덕분에 여름휴가로 10일간 캄보디아 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입가에서 맴돌던 찬양이 있었습니다.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라는 복음성가인데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로 편집했습니다. 영상을 보시고(4분 11초),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인간 세상의 축소판 수족관
캄보디아는 한국보다 2시간이 늦습니다.
그곳 시간으로 밤 10시 55분이지만, 이미 늦은 밤이었기에 숙소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첫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갔습니다. ‘씨세븐월드’라는 식당이었는데, 식당 한쪽에는 큰 어항이 놓여있고 거기에는 이런저런 생선이 들어있었습니다. 해물 쌀국수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어항을 바라보니 다리가 긴 ‘징거새우’를 놓아둔 어항에서 싸움이 일어났는데, 가장 큰 놈이 승리하고는 기세등등하게 산소가 나오는 플라스틱 줄기 가장 높은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다른 것들은 근처도 오지 못하게 합니다. 징거새우 수족관의 최고권력자를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시간만 된다면, 권력자로 등극한 징거새우를 구워달라고 주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 사람들도 저 작은 수족관의 징거새우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세상 권력을 탐하고, 세상의 부를 누리고, 성공하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군림하지만, 저 수족관의 징거새우의 앞날과 다르지 않은 것이지요. 18년 만에 방문한 캄보디아의 외형은 많이 변했지만. 기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화는 거의 없는 것 같았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하였고, 여전히 대다수 사람은 불교의 윤회설에 깊이 빠져있는 듯 보였습니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자신의 삶은 업보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삶이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지수가 아주 높습니다. 그러나 행복이 아무리 주관적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됨’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마약에 취한 것과 다름없겠지요.
■ 쓰레기 매립장에서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쓰레기 매립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그린 베델 스쿨’을 방문해서 쓰레기 매립장을 돌아보았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시큼한 음식물쓰레기 썩는 냄새와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유독가스로 숨을 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집을 짓고 재활용쓰레기를 수집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루에 400여 대의 쓰레기차가 들어오는데 낮에는 주로 그곳에서도 나름 빽있는 사람들이 작업하고, 해진 뒤부터 새벽 5시까지는 16~20세 청소년들이 쓰레기더미를 뒤지는데 200-300명 정도가 헤드 랜턴을 끼고 작업을 하다가 그곳에서 그냥 잠을 잔다고 합니다. 마약에 취한 아이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자고,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들이 임신해서 아기를 낳고, 그 아이들은 쓰레기매립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랍니다. 수직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에서 그들은 설령 그곳을 빠져나간들 얼마 못되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저는 비위가 강한 편인데도 그곳의 참혹한 장면들을 목격하고 차마 사진에도 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도 음식점이 있었는데, 음식에는 파리떼가 잔뜩 끼어있고, 아이들 얼굴에는 파리떼로 뒤덮여 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슬펐습니다. 밀림 지역을 지나다 만난 원숭이떼에게 땅콩을 주었더니 우두머리인듯한 놈이 죄다 먹어버리고 힘이 없는 놈은 하나도 먹지 못하길래 ‘원숭이 나쁜 놈!“ 이라고 했는데.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원숭이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어느 피조물보다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죄입니까? 수족관의 징거새우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 나는 이미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행 내내 이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선교사들의 허튼짓은 2001년도나 지금이나 여전히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100% 악인도 없고, 100% 선인도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들을 이용해서 돈벌이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의도가 불순하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렇게 ‘그린베델 스쿨’에 온 아이들은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아이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좋게 열매 맺기를 바라며, “하나님 이들을 보십시오. 이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을 좀 보십시오, 도와주십시오.”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나의 시선은 이미 이들을 향해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들에게서 내 시선을 거둔 적이 없다. 그들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너에게도”라는 말씀은 개인구원과 한남교회 목회에만 시선을 두고 있는 저를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너도 바라보라!”고 강권하셨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놓치고 살았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오늘 함께 읽은 시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계신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15).’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진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8). 그리하여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시고, 그 종들이 영혼을 속량(20,22)’하십니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율법조문을 잘 지킨 사람이 의인인가요?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롭게 거듭난 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이들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의인이라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칭의론’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오해해서 세상의 온갖 나쁜 짓을 다 해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그건 값싼 은혜요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사설에 불과합니다. 100% 온전한 의인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시선이 머무는 곳, 하나님이 귀 기울이시는 부르짖음에’ 눈을 두고 귀를 기울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고 듣는 것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가짜뉴스만 보면 그게 진짜인 줄 압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려면 좋은 책, 좋은 것을 자주 봐야 합니다. 좋은 소식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습니까?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전하는데 열을 올립니다. 왜, 사람들이 자극적인 소식에 열광하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동쪽에 사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는 훈련과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 시편 35편
시편 35편을 <시편사색>은 ‘은혜를 도리어 원수로 갚는 세상에서’라는 제목을 달아 해석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되돌리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길은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분에게 내어놓는 것입니다. 제 모습 그대로 다 내어놓을 때 받아주시는 분 안에서 참된 위로를 얻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화려한 언어와 수식이 아니라 끅끅거리며 힘겹게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린 베델 스쿨에서 기도하는 소녀들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무엇일까? 그들이 논리정연하게 기도할 줄 모르고,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지만, 두 손 모아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간구하심으로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벗들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고 그분의 귀는 온갖 탄식과 신음을 놓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유진 피터슨 목사의 시편 34편 15절의 번역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나를 힘겹게 하는 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상처를 받았어!”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 토로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수 나의 좋은 치료자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아서 힘듭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벗에게, 의지했던 이들에게 상처를 받아 힘듭니까?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시선이 당신을 향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제가 캄보디아 빈민촌과 쓰레기매립장에서 목격한 것들로 상처를 입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항변한들 무엇이 달라질까요? 저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하나님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물고 있다’는 확신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고자 하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을 듣고자 노력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만 바라보던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향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좋은 치료자이십니다. 좋은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존귀한 사람됨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