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共鳴)의 신앙
요한복음 5:1~18
■ 떨림+울림 =진동
‘우주는 떨림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물리학자가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떨고 있지만, 그 떨림이 너무 미약해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미세한 떨림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하다.’며, 인간은 그 떨림에 울림으로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이 ‘떨림과 울림’의 물리학적인 용어는 ‘진동’인데, 이 진동이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구는 쉼 없이 돌고 있지만, 지구는 돌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구가 돌면서 엄청난 굉음을 내지만, 우리들의 귀에 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히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입니다. 1800년 윌리엄 허셜이라는 과학자는 프리즘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발견을 합니다. 빛을 쬐면 따듯한 이유는 빛이 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셜은 프리즘으로 빛을 분리해서 색에 따른 온도변화를 측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빛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둔 온도계 온도가 가장 높게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손을 대보니 따스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열을 전달하는 뭔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는 빛 ‘적외선’이었던 것입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존재하고,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는 사실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 오감의 한계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눈으로 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본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김상욱이라는 물리학자가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에서 밝힌바와 같이,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역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하나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다.’라고 규정되는 순간,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노자의 도덕경 1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라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니다.
‘도’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지할 수 있거나 분석 혹은 정의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는 궁극 실재 혹은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우리의 제한된 표현양식을 초월합니다. 직관 혹은 체험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즉 ‘無名’,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혹은 ‘이름없는 것’이 ‘도’라는 것이지요. 동양사상이지만, 최근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고백한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 진동+진동 = 공명
거리에 서 있는 가로수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떨리고 있고 울리고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용어로 ‘진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체는 고유한 진동수를 갖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책상, 자동차, 유리잔 모두 고유진동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와인 잔을 수저로 치면 잔이 갖는 고유진동수의 맑은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물체의 고유진동수로 그 물체에 진동을 가하면 진동수가 증폭되는데 이것은 ‘공명’이라고 합니다. TV나 라디오의 채널은 자기만의 고유진동수를 가집니다. 방송사에서는 각 채널에 고유한 진동수의 전파를 보내고, TV나 라디오 채널을 맞추면 수신기의 진동수가 일치하면서 공명이 일어나서 그 채널의 신호만 수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방에 수많은 방송국의 전파가 있지만, 라디오 수신기와 TV수신기와 공명을 일으킨 채널의 방송만 나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의 원리도 같습니다. 고유한 번호만의 고유진동수가 있고, 다양한 전파 중에서 그 번호와 공명을 일으킨 전파만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도청할 때에는 그 번호의 고유진동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파수를 맞춘다’고 표현합니다. 전파나 진동 모두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지만, 둘을 만나게 하여 소리를 만들고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물리학을 통해서 누리는 혜택들입니다.
■ 신앙의 주파수
저는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사고, 당신의 뜻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계시를 보려면 우리의 신앙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신앙의 주파수를 맞추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침묵하신다고 하시며, 더 나아가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파수가 맞아야 공명이 일어나 소리가 들리고 이미지가 보일 터인데, 주파수를 맞추지도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고,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모든 방송국에서 전파를 쏘지만, JTBC방송을 보려면 채널 15번에 맞춰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우리의 채널을 하나님께 맞춰야 합니다. 우리의 채널과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차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지방으로 이동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잡음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지방마다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가 문제가 아니라, 지방으로 이동한 차량의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선명한 방송을 듣고자 한다면 주파수를 재설정해야 합니다. 또, 오지에서는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지국이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관통하고 세대를 관통하며, 항상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 말씀이 선명하고 또렷했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아갑니다. 세상 일에 치이다 보면,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실패했을 때, 그때야말로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자신의 실패에 온통 주파수를 맞추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라
주일은 흐트러졌던 우리의 주파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맞추는 날입니다. 주일예배는 하나님께 맞추고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영과 육을 치유하는 시간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의 주파수가 세상일에 맞춰져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뚜렷하게 들을 수 없습니다. 집중해서 예배를 드리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독서를 할 때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집중해서 한 문장 한 문장 따라가다 보면,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깊은 깨달음까지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설렁설렁 읽다 보면 정말 중요한 내용도 지나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자신의 삶의 정황에 따라 다른 느낌과 감동 받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다른 느낌과 감동 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 덕분에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런 경험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베데스다 못에서-38년된 병자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그 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해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지금 병자 앞에는 치유의 주님이 계시는데 병자는 여전히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을 바라봅니다. 주파수를 예수님께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못에 맞춰진 그의 주파수를 예수님께 맞추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병자가 늘 주시하고 있던,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던 베데스다 못은 그의 병을 낫게 할 수 없었습니다. 38년을 그렇게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그는 베데스다라는 주파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권하여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38년이라는 긴 세월, 왜곡된 주파수만 바라보던 그는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 주파수를 맞출 능력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고침을 받은 후에도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13절)’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비로소 자기의 병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고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이가 예수(15)라고 합니다. 이제야 38년 동안 베데스다 못이라는 잘못된 주파수에 맞춰졌던 병자의 주파수가 예수님에게 맞춰진 것입니다.
■ 베데스다 못에서–유대인들
그런데 병자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들은 그로 인해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박해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자진을 동등하게 여겼다며 분개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18).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주파수가 어긋한 이들을 봅니다. 이렇게 신앙의 주파수가 잘못되면, 그릇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주파수가 어긋나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공명을 가져오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그들의 삶은 떨림이 없었고, 울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떨림과 울림(진동)은 있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그들의 떨림과 울림(진동)이 없었습니다. 진동과 진동이 만나야 공명을 일으키는데, 공명이 없으니 그들의 신앙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착각합니다. 공명의 신앙이 없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명하지 않는 신앙, 착각의 신앙, 울림과 떨림이 없는 신앙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 공명의 신앙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이 삶을 울리십니까?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떨림의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울림과 떨림을 주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나의 인도자 항상 함께 하시네
매일 사랑과 힘주시며 인도하시네 인도하시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나의 인도자 항상 함께 하시네
매일 사랑과 힘주시며 인도하시네 인도하시네‘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세상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은 오늘날 물리학자들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신, 절대자,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존재한다.”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여러분이 삶이 만나 울림과 떨림이 되어 아름다운 공명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 공명은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이며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 이상의 기적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