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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숨은 제자(요한복음 19:38~42)

  • 관리자
  • 2019-04-14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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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숨은 제자
요한복음 19:38~42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건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일주일 예수님의 행적은 이렇습니다.

 

 

주일인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월요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뜰에서 장사는 이들은 내쫓으십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합니다.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종교지도자들의 덫을 놓는 질문에 대해 논쟁하십니다. 이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합니다. 목요일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기도를 마치신 후 잡히십니다. 금요일 이른 새벽,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합니다. 이때가 아침 9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6시간가량 고통을 당하시다 숨졌습니다. 속전속결로 이뤄진 재판은 이 재판이 정의롭지 못한 재판임을 알려줍니다. 토요일, 예수님의 시신이 돌무덤에 안장되고, 주일 새벽, 예수님은 부활하십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시신을 수습해서 장사를 지내는 두 명의 숨은 제자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목요일 밤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후대의 문학가들이나 예술가들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955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에 대한 공개적이며 인간적인 다양한 해석과 고민을 담아냅니다. 그 결과 카잔차키스는 자신이 속해있던 그리스정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합니다. 그로부터 28년 후엔 1983년에 마틴 스톨세지에 의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신성을 모독하는 영화라 낙인찍혀 1988년에야 개봉이 됩니다. 이 책과 영화에서 다루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었으며, 우리처럼 일상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온 인물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오한 영화는 오로지 예수의 신성에만 집착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엔토 슈사쿠의 <침묵>도 내용적으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관련되는 소설입니다. 에도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색출하기 위해 ‘후미에’라는 판을 만들어 밟게 합니다. ‘후미에’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십자가가 있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의심받는 자들은 이 판을 밟고 그들의 신앙을 배교해야 했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려고 일본에 왔지만, 정작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합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자신이 배교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딜레마에 빠져 하나님에게 외칩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때 하나님이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넵니다.

 

 

“밟아라, 밟아라, 나는 누구보다도 너의 발이 겪을 고통을 알고 있다. 밟아라. 네가 태어난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밟는 것이다. 나를 밟아야 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밟아라,”

 

■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금요일, 불과 며칠 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한영을 받았던 예수님은 막다른 골목인 ‘골고다’로 끌려갑니다. 그곳은 돌아올 수 없는 장소요, 죽음만 존재하는 곳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괴로워하는 예수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지만 예수님은 거절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누이고, 그 위에 예수님을 누입니다. 예수님을 그 십자가 위에 포갠 뒤에 양손과 발에 못을 박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나오는 환상이나 <침묵>에서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후, 십자가를 90도 직각으로 세우려고 움직일 때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서 피가 흐르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는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투를 벌이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이 말씀은 시편 22편 1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그런데 십자가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엘로이’라는 말을 구약 시대 선지자 엘리야로 잘못 알아듣고 이렇게 말을 주고받습니다.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두고 봅시다.” 결국, 예수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각자 살 길을 찾아 숨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수제자 베드로도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이 숨지는 순간을 응시하던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허망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철저하게 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 십자가 내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글을 읽지 못하는 대중에게 성서를 가르치고자 성서이야기를 회화로 표현합니다. 음악은 성서의 메시지를 감동적인 소리로 전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 예술가들은 성서의 중요한 사건을 시각, 청각적인 드라마로 표현해 신도들에게 강력한 신앙을 갖게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유럽의 회화와 음악이 발전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술 작품의 소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오늘은 그중의 한 작품인 네델란드 화가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의 <십자가 내림>이라는 작품을 나누고자 합니다. 바이덴은 1418년에 출간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서 깊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의 <십자가 내림>

 

 

그림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몸이 휘어져 있습니다. 마치 활시위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당시 화풍 중에 사람의 몸을 석궁 모양처럼 표현하는 양식이 있었는데 그 양식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인간의 삶이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더는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휜 것은 그의 삶 전체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 같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아래의 마리아 역시도 예수님의 몸과 비슷하게 휘어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과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나타내어, 이 둘이 일심동체임을 표현합니다.

 

 

왼쪽부터 어머니 마리아의 사촌이 마리아 클레오파, 사랑하는 제자 요한, 마리아의 또 다른 사촌인 마리아 살로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뒤편에는 주황색 옷을 입은 니고데모(혹은 아리마대 요셉)가 있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청년은 니그데모 혹은 아리마대 요셉의 종입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혹은 니고데모), 그 뒤에 향유를 들고 있는 아리마대의 종(혹은 니고데모의 종)이 있고, 맨 오른쪽에 손깍지를 끼고 절규하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바로 오늘 설교 제목 ‘두 명의 숨은 제자’입니다.

 

■ 두 명의 숨은 제자

 

 

이 그림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이들은 당시 유대 사회의 이름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여기에 있을까요?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니고데모인지 누가 아리마대 요셉인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질 때 그 자리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있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목숨까지 내놓을 것처럼 행동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자 바로 자취를 감춰버렸는데, 이 둘은 여기에 남아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은 극악무도한 형벌로, 처형당하는 이들은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게다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시신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시신은 맹금류의 먹이가 되거나 시신 일부가 떨어져 들개의 차지가 됩니다. 반면에 유대인에게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겪지 말아야 할 가장 비극적인 운명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정치범을 십자가형에 처했고, 그들을 십자가에 내버려둠으로써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방도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런 관행을 깨고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매장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두 명의 인물이 빌라도를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아리마대 요셉이었고, 두 번째 인물은 니고데모입니다.

 

■ 그들은 어떤 인물인가?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청하였다.’

 

‘명망 있는’의 그리스어는 ‘유스케몬’인데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존경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력가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은 1세기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명예나 지위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으며, 그간 자신이 누렸던 특권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유대인이었던 그는 안식일이 오기 전에 시신을 장례하고자 합니다.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릴 때 미리 준비해 온 ‘고운 천’인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쌉니다. 이 천을 그리스어로 ‘오소니온’이라는 천인데, 사제나 귀족의 옷과 장례에 사용되던 아주 특별한 천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서도 천이 나오긴 하는데, 그때 나사로를 감싼 천은 여러 개의 조각난 천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해온 천은 하나로 길게 연결된 최고급 모시던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장례를 위해 오래전부터 보관해두고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니고데모는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갔던 인물입니다. 그는 유대 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 역시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 그룹에 속해있었고, 성경에 유대인의 지도자였다고 기록되어있으므로 그 역시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부자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그도 소위 ‘뉴스메이커’입니다. 그가 예루살렘 거리를 지날 때면, 유대인들이 그의 모든 행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몰약에 침향을 섞을 것을 백 리트라 쯤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 로마의 무게 단위로 환산하면 100리트라는 21.8kg이나 되는 많은 양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짧은 시간에 가져올 수 있었던 것 역시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자신의 장례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몰약은 당시 초고급 사치품 중 하나였습니다. 시신이 부패할 때 나는 고약한 냄새를 없애는 역할을 합니다. 니고데모 역시도 안식일이 오기 전에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안식일이 오기 전에 예수님을 매장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요셉이 기증한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은 땅에 매장되었습니다. 특히, 십자가형으로 죽은 시신은 예루살렘 서쪽의 ‘게힌나’라는 곳에 유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무덤은 입구에 돌을 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덤은 당시 최고 권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무덤이었습니다. 당시의 무덤이 1,000개 정도 발견되었는데, 그중 열 개 정도만 굴릴 수 있는 돌로 입구가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 무덤 역시도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이 미리 자신들의 무덤으로 쓰고자 준비해 두었던 무덤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숨은 제자에서 드러난 제자로

 

왜,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예수님의 무덤과 장례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했을까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왜 갑자기 등장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까요? 그들은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마지막을 함께한 숨은 제자들이었음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임을 깨닫고,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권위와 사회적 위치를 다 버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합니다. 이 일은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아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제자들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아무런 비용도 필요 없었을까요? 분명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치 일제치하에서 독립군에게 자금을 조달하던 부자들처럼, 이들도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 중에서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서의 기록이 완료된 시점으로 보면, 마가복음이 서기 70년경에, 마태복음이 75년경, 누가복음이 80년경, 요한복음은 서기 100년경 이후로 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종교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상당히 강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도 껴안고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요한의 나이는 90세 이상 100세 정도일 것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는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 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 한남교회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묵묵히 한남교회를 섬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숨은 제자이신 여러분도 언젠가 교회가 필요로 할 때,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앞장서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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