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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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받아들이라!(누가복음 15:1~10)

  • 관리자
  • 2019-03-31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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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받아들이라!
누가복음 15:1~10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저에게는 전하는 지혜를, 여러분에겐 듣고 깨닫는 지혜를 주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 ‘잃어버림’을 당한 것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잇달아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돈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입니다. 처음 두 가지 비유는 구조적으로 거의 같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구조는 다르지만, 주제는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는 비유가 이야기되던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런 상황에서 말씀하신 비유는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들이 좋지 않게 평판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합당한 이유를 ‘잃은 양의 비유’에 대한 마태복음 병행절, “너희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마 18:10)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마 11:9, 눅 7:34). 유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석함으로 예수님도 ‘잃은 양’으로 비유되는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에 속해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이 비유의 말씀에서 ‘잃어버림을 당한 것’은 바리새인과 종교학자들이 업신여기는 ‘죄인과 세리와 예수 자신’입니다.

 

■ 밥상공동체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잃어버린 것들의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들과 종교학자들에게 진정 당신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가려면 당신들이 배척하여 잃어버린 죄인들과 세리와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라는 강력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세 비유의 핵심은 잃어버림을 당한 사람에게 관심을 베풀고 포용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요, 그것을 통해서만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회개하라는 권면의 말씀이 아니라, 사회적인 강자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 몸소 ‘죄인과 세리를 영접하여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입으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은 예수님의 메시지보다는 세리와 죄인으로 지탄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처신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기존의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고, 그것이 일상화된다면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지배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방해했던 것이고, 이에 반해 예수님은 끊임없이 말씀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하신 것입니다. 식탁의 교제는 ‘밥상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식탁의 교제는 단순히 밥을 나누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주일예배 후 함께 나누는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한솥밥을 먹으면서 한가족이요, 식구임을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친구임을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귀한 일을 열심히 감당해 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 은돈과 잃은 양 비유의 해석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이 세 비유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 은돈의 비유는 거의 같은 짝을 이루고 있고, 탕자의 비유는 처음 둘과 비교하면 내용이 엄청나게 확대되었습니다.

 

먼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은돈에 관한 비유입니다.

“열 드라크마(은돈)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러한 물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잃어버린 그 한 닢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묻는 것입니다. 9 vs 1이라는 산술적으로 잃은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찾은 후에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아 자축의 잔치를 베푸는데 1 이상의 비용을 들여 잔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여기서도 산술적 계산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찾음의 기쁨. 회복의 기쁨이 크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지, ‘잃어버린 1이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없어도 되는 것’이라는 표현도 아니고, 9가 더 크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마태복음 18장 10~14절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보다 누가복음의 것이 더 길게 부연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회개와 잔치’의 내용이 덧붙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에게 ‘작은 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는 취지에서 비유가 말해졌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적대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는 적대자들에게 박해를 받을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가 이리 떼나 늑대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산술적인 계산은 통하지 않습니다. ’99 vs 1’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잃은 것에 대한 목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잔치를 통해서 그 기쁨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찾음의 기쁨이 이렇게 큰 것이라면, 잃음의 안타까움도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종교학자들은 잃음을 외면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잃었던 아들 비유의 해석

 

 

이 비유의 주제도 앞에 나온 두 비유와 같은 잃은 것을 찾는 것의 중요성과 찾을 때의 기쁨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전개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여기에는 집에 남아있던 맏아들의 거부반응이 첨가되어 있고 ‘잃어버린 상태가 자의적인 것’으로 나옵니다. 앞의 두 비유는 잃은 것을 찾은 것 자체가 주인에게 사실상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잔치를 베풀고 기뻐한다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는 다릅니다. 일단 맏아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이 비유에서처럼 잔치를 벌이는 것이 맞느냐고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물으면 찬반양론이 갈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 역시도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쁨이 중요하지, 그가 어떻게 재산을 탕진했는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허랑방탕’이라는 한 마디로 참된 삶에서 벗어나 있음을 상징할 뿐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찾음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맏아들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이 모습은 곧 바리새인들과 종교학자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 비유의 핵심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의 바탕에 깔린 핵심 내용은 잃음 찾음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길 잃은 양’이라는 은유를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타락한 사람’ 혹은 ‘죄인’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이것은 7절과 10절에 나오는 ‘회개’라는 단어에서도 나타나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로 오면 ‘타락한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이 세 비유의 초점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잃어버린 것을 찾음’에 관심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잃음’이라는 단어는 ‘타락한, 죄를 지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삶의 길을 잃은’ 혹은 ‘살 길을 잃고 유리 방황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이 사려없는 생활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불량아로 등장하니까 ‘타락에서 회개로’라는 윤리적인 교훈을 끌어내기 쉽지만, 사실 이 비유의 핵심도 ‘삶을 상실한 자가 삶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은 비유의 의미를 오해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분명해집니다.

제가 앞부분에서 잃어버린 자, 혹은 평판이 좋지 않은 자에는 죄인과 세리뿐 아니라 예수님도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윤리와 도덕과 종교의 잣대로 평가하던 ‘잃어버린 자, 상실한 자 죄인’은 타락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노골적으로 아버지의 처사에 항의합니다. 가정의 공정한 질서가 파괴되고 있다고 항의하는 것처럼, 예수 당신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밥상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를 벌여준 아버지가 자식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큰아들에게 비난받듯이 예수님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종교학자들에게 비난받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비방하는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는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핵심은 “그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 그들은 누구인가?

 

 

오늘날 ‘평판이 좋지 않은, 잃어버린, 상실된, 9 vs 1, 99 vs 1’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강자들에 의해서, 신자본주의라는 사회구조 때문에 살아보려고 발버둥 침에도 상실된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은 누구인가요? 그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지 않아서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품어야 할 그들은 다양합니다.

사회적인 약자들, 이주민 노동자들과 난민들과 심지어는 성소수자들에 이르기까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품어야 할 대상이요, 식탁의 교제를 나눠야 할 이들임을 기억하십시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을 품으려 한다면,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부터 바꿔나가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품고자 하는 시도를 반대하고 혐오하게 하는 것들과는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깨달은 바대로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거저 오지 않습니다.

침묵의 시간과 고난의 시간과 회심의 시간을 묵묵히 견딘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강권하시며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들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사순절, 우리 주위에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품으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헤아리셔서 예수님처럼 ‘그들을 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아멘.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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